상단여백
HOME 기획 법문
전통과 관례가 무너진 혼란한 사회, 자신의 불완전성 관해야우리가 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지혜란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구체적 인습과 자질을 관해봄으로써 어떻게 써야할지 숙고하는 것

아잔 수메도 스님의 이번 법문은 1984년 영국불교협회의 하기수련대회에서 상좌부 불교반의 영미 불자들에게 행한 강연 내용으로 영국불교잡지 <The Middle Way>,1985년도 11월호에서 옮겨 실었다. <편집자주>

 

아잔 수메도 약력1977년 아잔 차는 영국 승가 후원회(English Sangha Trust)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할 때 10년여 동안 키워온 영국인 수제자인 아잔 수메도가 동행했다. 아잔 차는 얼마 후 귀국했지만, 영국에서 다르마를 구하는 열기가 뜨거움을 감지했기에 아잔 수메도를 불교도가 보시한 아파트인 헴스테드 승원(Hempstead Vihara)에 남겨두고 갔다. 그렇게 해서 영국 남부의 웨스트 서섹스(West Sussex)에 소재한 아름다운 청정림인 해머우드(Hammerwood) 숲에 수행자들이 법을 수행하고 전할 수 있는 터전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108 에이커 규모의 치타비베카[Chittaviveka,‘고요한 마음’의 뜻] 승원이 유럽 최초의 산림 승원이 되었다. 1984년에는 두 번째 승원인 아마라바티[Amaravati,‘무사계(無死界)’의 뜻]를 설립하고 아잔 수메도가 승원장이 된다. 특히 아마라바티는 런던에서 한 시간도 안되는 거리에 있어 주말수련과 단기수련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수행처가 되고 있으며,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아잔 수메도는 전세계의 숲속승가 계열 승원의 지휘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영국에 노섬버랜드(Northumberland) 승원과 드본(Devon) 승원, 스위스에 칸데르스탁(Kanderstag) 승원, 이태리에 세자로마노(Sezza-Romano) 승원, 뉴질랜드에 웰링턴(Wellington) 승원, 오스트레일리아에 서펜틴(Serpentine) 승원 등이 설립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의 삶으로부터 배우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인간 조건을 이루는 인습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전통적 관례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주시하고 숙고할 수 있는 마음이 성숙했다는 증거라 해도 좋겠습니다. 
이제 그런 마음으로 살펴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바야흐로 인습적 관례가 크게 무너져가고 있는 사회입니다. 어찌 보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며, 이제는 분명한 관례라곤 하나도 남아있지를 않습니다. 이전에는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 요직에 부합되는 지도자들의 자질이, 귀족적인 품의 같은 것이, 모두 분명하게 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관례는 분명하고 확고부동했으며, 우리는 그런 위계적 구조 속에서 각자 자기 위치를 지키고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구조가 내팽개쳐져 버렸고 평등, 자유, 행복추구, 개인주의 등의 이상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혼란한 상태, 혼란한 사회에 우리는 처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분명하게 규정된 것이라곤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 아무도 남하고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는지 똑바로 알고 있지를 못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많은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자유를, 즉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파 뒤집고, 별의별 실험을 다 해볼 수 있는 자유를 너무 많이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에는 이익과 불이익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민주주의에서는 매사가 이롭기만 하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도 불이익은 역시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매우 조직화되고 구조화된 사회, 모든 사람이 윗사람, 아랫사람에게 대해 자신의 위치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사회에도 이익과 불이익은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이상으로서의 자유만을 생각하고 있어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방해하는 것은 일절 존재하지 않는 그런 자유를 그리고 있습니다. 참 멋진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윗사람, 아랫사람, 동등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책임감을 지니고 한 구조 속에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횡포요, 억압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숙고하면서 살펴보기 시작하면 모든 인습적 관례에는,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든,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인 것이든 거기엔 이로운 점과 불리한 점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완전한 것은 찾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어떤 인습에서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그대로의, 이로운 것뿐이고 불이익은 하나도 없는 그런 완전한 자유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지혜는 바로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구체적인 인습들을 때와 장소에 알맞게 이용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는 편이 완전한 것만 끝없이 찾다가 결국 전적으로 이롭기만 한 것은 도대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게 되는 편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물에 대해서 활짝 열어야 합니다. 더 이상 어떤 고착된 편견의 입장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한 가지 입장만 택하여 거기에 집착하면, 그것을 위협할 것으로 보여지는 그 모든 여타의 것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여기에, 놓아버리고 관찰하는 길이, 마음을 시간에 대해 공간에 대해 여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길은 정신 차려 지켜보는 마음가짐을 요구하며, 우리가 취하는 모든 언행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반드시 최선, 최상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벗어나 시행착오를 통해서라도 배워나가려는 의지를 요구합니다. 어쨌건 우리의 마음만 열리면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일에서 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며, 실수를 범하게 되면 그 실수를 받아들여 교훈을 삼을 수 있도록 마음가짐이 되어있어야 하겠습니다.“젠장, 내가 정말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실수가 있을 수 있어. 이것만 봐도 나는 틀렸어. 무얼 하건 또 실수만 저지를 게 뻔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나는 항상 정념(正念)을 유지하고 있어. 나에게 실수란 있을 수 없어.”라는 식으로 자기 행위를 무조건 합리화시키려들거나 해서는 곤란합니다. 누가 곁에 있다가“흥, 당신이 실수하는 걸 이 눈으로 똑똑히 봤는걸.”이라고 하면 당신은“천만에, 그건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거야. 그건 신중한 생각에서 나온 현명하고도 교묘한 조치였다구.”라고 둘러대려 듭니다. 우리는 자기가 지닌 결점이나 자기가 행한 짓거리를“너의 지혜를 시험해보려 일부러 그래 본 것이야.”라는 한 마디로 모두 정당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양심적이지 못한 스승일수록 그런 짓을 곧잘 합니다. 
상좌부 승려 노릇에도 이로운 점과 불리한 점은 다 있습니다. 우리 스님들이 하는 얘기를 듣다보면 자칫 승려 노릇엔 온통 이로운 점뿐인 것으로 생각이 들 때가 있겠지만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불리한 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불리한 점이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측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인습이 지닌 이로운 점과 불리한 점 그 모두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성(性)에 관해서도, 지금 문제되고 있는 것은 이상적인 평등을 실현하는 것으로 남녀에게 똑같은 권익을 보장하여 일체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주안점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고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상으로써 이를 실현하려면 높은 지혜가 필요하며, 특히 그 지혜는 남성적인 지혜도 여성적인 지혜도 아닌, 성을 초월한 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인습의 차원에서는 아직도 차별이 끝없이 많이 있습니다. 여성 편에서 보면 남성 쪽이 훨씬 이로움을 많이 누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남성이 되든 여성이 되든 이로운 점과 불리한 점은 있습니다. 남자가 된 데에도 분명히 많은 불리한 점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이 문제에 있어서도 쌍방의 장단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할 일이지 어느 한쪽 성이 되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는 식의 생각은 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아(에고)의 문제로 넘어가면 문제는 딱 하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문제는 어쩌면 한결같이 불만족스러운 것뿐이냐는 것입니다.“나의 부모님은 왜 깨달은 분이 되어주지 못하셨을까. 그러고 보니, 이 나라의 대통령이란 존재들도 도대체가 문제로군. 미국의 역대 대통령치고 아라한이 어디 한 사람이나 있었나. 아라한은커녕 불교도도 아니지 않은가. 나를 가르쳤던 학교 선생님들도 이제 생각해보니 모두 일종의 노이로제 환자들이었어.”라는 식으로 매사가 못마땅하고,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럼 이제 그 모든 것이 반대로, 마땅한 쪽으로만 이루어졌다고 쳐봅시다.
즉 미국 대통령을 모두 아라한들로 뽑을 만큼 미국인들이 지각이 있고, 나의 어머니 아버지는 충분히 깨달은 분들이셨다면, 그러면 나는 이로운 점만 고루 다 갖추게 되고, 따라서 지금처럼 골치 아픈 문제는 하나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며 만사가 형통했을 것이다! 정말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
이처럼 조금만 깊이 숙고해보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념들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는 가장 큰 불리한 점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큰 지혜를 얻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장님이나 귀머거리 또는 소아마비로 태어난 사람들은 평소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탓인지 때로는 우리 기준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나게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무서운 힘과 지혜를 짜냅니다. 이에 반해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이점, 신체적 건강, 미모, 지위 등등을 고루 빠짐없이 갖추었는데도 이렇다 할 업적을 전연 못 이루고 마는 수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이 너무 손쉬운 탓인지 생활에서 박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자기 만족에 빠졌거나 방일해져 버린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가 지니고 있는 인습적 자질을 깊이 관(觀)해 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재고 평가하거나, 심지어 자기가 제일 좋은 점을, 제일 잘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해서 풀이 죽거나 하질 않고 자기가 지닌 성품이나 능력, 또는 능력 부족을 있는 그대로 어떻게 써야 할는지 강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개체로서 우리가 지닌 한계선 내에서 어떻게 현명하고도 원숙하게 처신할 것인지 강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저작권자 © 제주불교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주불교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