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상황서도 빛나는 법력, 평생수행이 빚은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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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상황서도 빛나는 법력, 평생수행이 빚은 결과물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7.12.0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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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의 주춧돌, 당신을 모십니다-수열 스님(남원 선광사 주지)

본지는 격동의 한국 근대사에 태어나 제주불교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온 도내 원로 스님과 불자들의 지혜를 듣는 기획 프로그램‘제주불교의 주춧돌, 당신을 모십니다’라는 주제로 연재하고 있다. 이번호에는 도내 태종종단의 법맥을 잇고 있는 수열 스님(남원 선광사 주지)을 2회에 걸쳐, 지면에 모신다. <편집자 주>
 

묵담대종사에겐 훌륭한 법손들이 많았다. 하지만 묵담대종사의 법을 상징하는 가사는 동산 스님이 입적하자 수열 스님에게 전해졌다. 수열 스님은 큰 스님의 가사를 보관하는 것조차 커다란 짐이라 생각했다. 수열 스님은 큰 스님 같은 법력을 가진 후손이 배출되어 이 가사가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큰 스님의 수행력 감히 넘볼 수 없는 경계
큰 스님의 가사 훌륭한 법손에게 전해지길

묵담대종사는 해동율맥을 이은 제9대 율사로서 전계화상이면서 동시에 불교의 이론과 실천을 겸전한 불교사상가이며 실천가였다.
지난 11월 25일 사회복지법인 춘강 대강당에서 <묵담대종사, 그의 선.교.율> 출판 봉정식 및 학술대회가 열린 가운데 묵담대종사문도회장 수열 스님(남원 선광사 주지)은 큰스님을 입에 오르고 내리는 것조차 불경스럽다고 생각했다. 후손으로 큰 스님의 법력에 누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날 참석해 축사를 한 조계종 원로부의장 암도스님과 태고종 총무원장 편백운 스님은 묵담대종사님의 생애와 유품을 16명의 학자들이 각 분야별로 재조명했다는데 후손들의 열정에 감탄과 더불어 부러움을 전하기도 했다.
이 같은 칭찬에 수열 스님은“동서양을 막론하고 선조를 빛내고 기리는 것은 후손들의 마땅한 도리”라며“15여 년 전 후손들이 법문집을 냈지만 아쉬움이 짙었다. 춘강 이동한 이사장님이 큰 도움으로 생전 시절과 업적을 재조명하게 되어 기쁘다”고 이동한 이사장에게 모든 공덕을 돌렸다.
단순 율사가 아닌 선교를 겸한 대선지식인 묵담대종사의 법력을 상징하는 가사를 왜? 수열 스님에게 전하셨을까. 이제, 묵담 대종사와 수열 스님의 인연의 고리를 거슬러 올라가보고자 한다. 
남원 선광사는 지난 1942년 수열 스님의 부친이신 보화당 법인 스님이 현 위치에 초가 3간의 법당을 건축하면서 ‘천태종’으로 산문을 열었다. 하지만 1954년에 이승만의 담화에서 비롯된 종단의 분규인 불교정화운동은 불교의 위상만 떨어뜨렸을 뿐 그 어떤 명분도 없었다.
결국 분규에 실증을 느낀 원인상 스님을 비롯해 보화당 법인 스님의 은사인 방동화 스님 등이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법화종 창종에 불을 지피게 된다. 제주시에서 서부지역으로  걸으며 법화종 법력을 폈던 스님들의 맥은 서귀포시 보목동‘혜관정사’에서 그 맥이 끊긴다. 남원부터 성산까지 법화종 홍포에 매진했던 보화당 법인 스님이 지병으로 아미타부처님의 품안에 안기게 된 것. 법화종 제주교구 사찰들이 동부지역서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기인한다. 
“선광사가 법화종단에 소속 된 사찰이 될 뻔 했지요. 1960년 대 초 부친께서 그 당시는‘윗병’이라 말했는데 지금의‘위암’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14살 무렵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선친이 일찍 입적하시면서 동진출가를 하게 됩니다. 16살에 현 정방사에서 행자생활을 하게 되면서 태고종과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수열 스님은 정방사 당시 주지‘혜안스님’이 타 지방으로 가시면서 태고종 종무일을 보았던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원당사’로 가게 된다. 지난 1945년 일본 유학 당시 재일교포의 간청에 의해 제주시 삼양동 원당사 주지로 취임했던 은사, 동산 스님과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다. 동산 스님이 어떤 분이시던가. 1970년 태고종이 창종되자 태고종 제주종무원장에 취임했고, 1975년 대종사 법계에 품수를 받으며 50년 가까이 제주에서 교화활동을 전개하며 제주불교 발전에 힘을 기울였던 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된다. 자연스럽게 묵담 큰스님과 인연도 그렇게 시작됐다.
“묵담 큰스님이 법랍 환갑을 맞아 시봉을 해야 한다는 어른 스님들의 말씀에 따라 담양 용화사에 가면서 첫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1년 여 동안 시봉을 하다가 군대에 입대하게 됐고, 휴가 때면 찾아뵙고 그랬지요. 제가 27살에 제대를 했는데 큰스님이 저에게 문득‘담양 용화사 주지를 하라’는 엄명이 떨어진 거죠. 그때만 해도 큰스님처럼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 자신이 없었어요.”
묵담대종사는 해동율맥을 이은 호남제일의 율사이다. 이런 엄격한 율사 밑에서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다. 더욱이 군대를 곧 제대했던 터라, 모든 것이 낯설고 고단했다. 그럴수록 스님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 커져 갔다.
그 길로 제주에 내려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선광사 주지를 맡게 된다. 하지만 스님은 곧 깨닫게 된다. 주지라는 것이 기도만 해서 신도들을 정법으로 인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한계를 느낀 스님은 신도들을 정법으로 인도해야겠다는 일념하나로 전남 순천 선암사 불교전문강원의 문을 두드린다. 절차탁마하는 도반 수암 스님과 3년을 함께 수학하다 신도들의 권유로 내려왔다가 1년 후 2기로 강원을 졸업하게 된다. 그 후 제주교구 종무원의 소임을 볼 무렵, 큰스님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난생 처음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싣고 병원을 찾았다. 급성폐렴이었다. 의사는 일주일 안에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후손들이 최선을 다해 병간호를 할 무렵, 신도들이 병문안을 오면 법문을 일일이 해주시는 등 그 정신력은 참으로 대단했지요. 극한상황에서도 빛이 나는 그 법력은 평생을 수행이 빚어놓은 결과물이었던 게지요. 그 생각만 하면 그 높은 법력에 아직도 소름이 돋을 정돕니다. 40여 일만에 큰 스님은 퇴원을 하셨지요. 그동안 저는 병원에서 큰스님을 시봉하며 병실에 누울 자리도 없어 자연스럽게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을 하게 됐답니다.(웃음). 이 같은 법력 때문인지 큰 스님에 대한 신비로운 일화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요. 제주 원당사에 보살계 법문 차 내도하셨습니다. 송당목장에 방목되는 매우 사나운 소였는데 큰 스님이 뿔을 잡으시자 아주 순한 양처럼 가만히 있었던 일화를 보더라도 축생도 큰 스님의 법력을 알아봤다는 방증이겠지요.”
묵담대종사는 폐렴을 앓은 후 한쪽의 폐는 완전히 녹아버렸다. 살아계시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법문을 할 여력이 없었지만 입적하는 그날까지 법을 펴시다가 1982년 1월 3일 가부좌로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86세, 법랍 75세였다.
태고종단 장(葬)으로 담양 용화사에서 다비, 9과의 사리 가운데 제주에는 선광사를 비롯해 성광사, 금붕사, 성림사에 각각 한 개씩을 나눠 봉안했다. 그리고 큰 스님의 선교를 겸한 대선지식을 상징하는 가사는 동산 스님이 입적하자 수열 스님에게 전해졌다.
묵담대종사에겐 훌륭한 법손들이 많았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법전 스님도 큰 스님 밑에서 3년 동안 행자생활을 했을 정도다. 큰 스님을 입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경망스럽다고 여길 만큼 큰 스님의 수행에 누가 되기 싫었던 수열 스님은 그 가사를 보관하는 것조차 커다란 짐으로 생각했다.
“큰 스님은 저에겐 항상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봉을 하면서도 항상 욕도 많이 먹었지요. 그래서 수행자로 큰 스님의 수행력을 감히 넘볼 수 없다는 경계가 저에겐 항상 존재하는 가 봅니다. 불자들에게 계를 전할 때 이외는 제외하고는 수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바람이 있다면 큰 스님의 법력을 가진 후손들이 배출되어 이 가사가 전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다음호에는 수열 스님이 종단과 제주불교 발전에 헌신해 온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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