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 화합이 최우선…선시 발표하며 화동단결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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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화합이 최우선…선시 발표하며 화동단결 촉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2.1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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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 현대 한국불교와 묵담대종사 - 김경집 진각대학원 교수<상>

묵담대종사문도회(대표 수열 스님)는 11월 28일 <묵담대종사, 그의 선.교.율> 출판 봉정식 및 학술대회를 춘강대강당서 개최했다. 이날 16명의 학자들이 묵담 대종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소중유품에 대해 발표했는데 이를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주>

 

김경집 진각대학원 교수는 묵담대종사에 대해‘근대 지계제일의 율사’‘광복 후 승단갈등의 조정자’‘화합 승가를 지향한 지도자’로 칭송했다.

 

근대에서 현대까지 한국불교 발전에 기여한 불교수행자 가운데 많은 분이 소속 종단이 다르다는 이유와 후학의 부재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거나 자료조차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묵담대종사(1896~1981) 역시 그 가운데 한분이다. 그의 생애는 한국불교 근현대 격변의 시대와 일치한다. 출가 후 교학을 이수한 다음 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입적할 때까지 지켜온 지계정신은 당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일제가 한국불교를 통제하면서 변질된 교단의 수행생활은 어렵고 험난한 일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근본에 투철했다. 올곧은 수행자의 삶은 많은 납자들의 사표가 되었다.
지도자로서의 역할과 한국불교의 현대화를 위한 활동도 남달랐다. 광복 후 새로 설립된 종단에서 감찰원장과 종정을 지내며 정신적 지도자로서 승단의 갈등을 조정하며 화합승단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가운데 불교의 사회적 지평을 확대한 선지식이었다. 
그러나 비구 중심의 교단이 형성되자 그의 수행과 활동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비구승 중심의 종단은 자신들과 대척점에 섰다는 이유로 연구와 선양사업에 무관심했다. 대처승 중심으로 새로 설립된 종단은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시간과 재원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한국불교 근현대 종단을 이끈 지도자요, 선지식의 위상에 대한 연구는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현실은 우리 스스로 한국불교의 범주를 제한하는 일이며 불교발전의 동력을 상실하는 일이다. 한국불교 미래를 위해서도 커다란 손실이다. 그들 역시 한국불교를 발전시킨 주체이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과 삶은 올바르게 평가되고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근대 지계제일의 율사
한국불교 계맥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이곳에 구법을 전하며 통도사 금강계단에 율종을 세운 것에서 출발한다. 묵담대종사는 금해 율사에게 전수받아 해동 9대 율사가 되었다. 이런 계맥을 전수받고 한평생 율사의 자세를 잃지 않고 수행한 것은 한국 근대불교에 있어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오랜 동안 지속된 배불정책으로 불교계는 쇠락한 상태였다. 승려는 사회적인 인식도가 낮아 있었다. 대종사 출가 무렵인 1906년 사찰 앞에는 술을 팔고, 생선을 요리하는 음식점이 있으며, 처나 첩이 있는 승려가 많았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한국불교 수행자들은 계율에 철저하지 못했다. 
개항 이후 한국에 들어온 일제의 통제와 일본 승려들의 생활도 지계정신이 훼손되는데 일조했다. 그들은 대처식육에 있어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일제도 1911년 사찰령과 그 시행령을 통해 사법을 제정될 때 각 본말사의 주지를 비구계를 수지한 자로 제한했다. 그러나 지배가 지속되면서 점점 계율에 대해 관용적이 되어 결국 1926년 5월 본말사법이 개정되어 대처식육이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계의 자세를 넘어 율사의 생활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남다른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23세인 1918년 백양사에서 대선사 법계를 받고, 37세인 1932년 대종사 법계를 받은 것은 그가 지계제일의 생활로 일관했음을 시사한다.
대종사에 있어 지계는 단순한 조항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불교를 호지하는 기본이었다. 계행을 행하는 것은 금강보다 더 강한 부동지의 마음자리를 잡아서 어떠한 나쁜 환경이나 번뇌가 유혹할지라도 거기에 빠지지 않으며,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한 기본으로 인식했다. 

#광복 후 승단갈등의 조정자
광복 후 독립운동을 하던 불교인들이 일제 잔재 청산에 큰 과제로 여기로 청풍납자와 도제양성을 도모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됐다.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1차 유시가 발표되면서 비구와 대처 간의 양측 갈등이 깊어지자 1954년 종단 집행부 감찰원장을 맡은 대종사는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종단 화합을 강조했다. 불교계 문제가 점점 사회적인 문제로 번져가면서 정부도 이에 대한 수습책을 마련했다. 1954년 12월 22일 정부는 비구승과 대처승 모두를 인정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에 비구승은 12월 25일 종단 내에 대처승을 인정하는 않는 정화추진대책안을 작성해 정부에 제출했다. 
대종사는 김상호, 정봉모, 이화웅, 박대륜과 함께 대처측 대표로 참가했다. 회의 때마다 어느 쪽의 이익보다는 한국불교가 화합된 승단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다섯 차례에 걸친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과 점점 비구 측으로 유리하게 진행됐고, 종헌을 근거로 주요 사찰을 접수했다. 이런 움직임에 대처 측 저항도 거셀 수밖에 없었다. 사찰 소유권을 둘러싸고 소송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런 과정에서 1956년 6월 15일 법원은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 및 사찰정화대책위원회의 결의가 무효임을 판결했다. 7월 27일에는 태고사 명도 가처분에서도 대처 측 승소판결에 태고사를 비롯해 주요 사찰이 다시 대처 측으로 넘어갔다. 
대종사는 1957년 1월 16일 제4대 종정 만암 스님이 입적하자 3월 17일 그 뒤를 이어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불교계 상징적인 위치가 되어서도 무엇보다 종단 화합이 최우선이었다. 6월 28일 제16회 조계종 중앙종회에 즈음해 선시를 발표하며 화동단결 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문교부는 승려자격에 대해 현재 대처승의 기득권을 인정하지만 앞으로 출가 독신자만 승려로 인정하기 때문에 앞으로 대처승은 출가독신으로 승려가 되든가 환속해야 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묵담 종정은 1962년 4월 1일 새로 구성된 통합종단 중앙종회에서 종정후보로 나왔으나 효봉 스님이 선출되고, 종무원장은 대처 측 임석진 스님이 선출된다.

#화합 승가를 지향한 지도자
불교인의 오랜 숙원 끝에 건립된 통합종단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종회를 구성했다. 1962년 8월 3일 비구, 대처 측 5명과 사회대표 5일 그리고 문교부 문예국장 1일으로 개편된 비상종회는 8월 20일 문교부에서 개최한 회의에서 종회의원 수를 50명으로 하고 이 가운데 비구 측 32명, 대처 측 18명으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에 승복할 수 없는 대처 측은 무효를 주장하면서 8월 18일 중앙종회 개원식에 불참했다. 
이를 지켜본 묵담대종사는 1962년 9월 9일, 10일 문교부 장관과 박정희 의장과 중앙정보부장 앞으로도 지금까지 생각해온 정화관과 승려의 조건 그리고 앞으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을 담은 서한 보냈다.
대종사는 첫째, 불교재건위원회의 월권에 대해 지적했다. 
둘째, 위원회 위원들의 사무처리에 대해 지적했다. 자주성 없이 관력에 의존해 굴종한 나머지 기존 종회를 그대로 두고 또 그 종회의 위임 받은 바도 없는 종법사항을 닥치는 대로 처리했다. 
세 번째, 독신승에 대한 소회와 대처승에 대한 장점을 지적했다. 체계화된 신도 조직도 없고 국가적인 재정도 뒷받침도 없는 우리 종단은 토지제도 개혁으로 인해 유지 운영의 유일한 기반이었던 사유토지가 없어진 그날부터 조선시대 이래 최후 거점이었던 산중불교가 종을 고한 금일, 옛날과 같은 총림불교를 망상하고 독신승 제도를 고집하여 보았자, 급격한 승려의 질적 저하와 생기 없고 무능한 고식침체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에 반해 불교에 생동력을 주입하고 대중 속으로 침투하면서 자각이타의 대비행원과 불조의 자광을 널리 적실 수 있는 길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했다. 이 과업을 수행함에는 현 단계에서는 독신승보다는 대처승 측에 더 많은 기대를 가질 수 있을 만큼 대처 중에는 유능한 인재가 많다. 따라서 50인 종회원 가운데 대처승 측 18인이 출석을 거부한 것은 구구한 인원배정 상 비율문제가 아니고 원칙에서 벗어난 부당한 처사의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음호에는 묵담대종사의 현대불교의 지평을 확대한 선지식 편으로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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