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습하면서 알아가는 불교상식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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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습하면서 알아가는 불교상식 <56>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2.1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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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법사 ②

자장이 신라로 돌아와 임금께 보고하자 왕은 스님으로서 최고의 지위인 국통에 임명했다. 황룡사를 창건하고 탑을 세워 부처님을 봉안했으며 월정사, 태화사, 대둔사를 차례로 건립했다. 
취서산 아래 독룡이 사는 연못으로 가서 설법하여 독룡을 조복 받고 연못을 메우는 동시 단을 설치해 사리와 가사 등을 봉안했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하니 곧 삼보 중 승(僧)의 최고 절이다. 
통훈대부로서 사헌부의 지평 직무를 보던 유해(柳楷)가 지은 비슬산 용연사의 여래 사리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스님 자장이 당나라에서 몇 과를 모셔와 양주의 통도사에 안치한 것은 두 개의 함으로써 한 개의 함에 각각 2과씩 들어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탑을 헐고 그것을 가져갔으나 송운 대사 유정이 격문을 전해 재앙과 복을 명확히 일러주자 왜적들은 겁을 먹고 돌려주었다. 송운 대사는 그것을 받들고 금강산으로 가서 서산 대사 휴정께 처분을 여쭈었다. 서산은 그 사리함을 문인인 선화 등에게 주어 태백산 보현사에 봉안하게 하고 또 한 개의 사리함은 송운에게 주어 도로 통도사로 가지고 가 탑을 고쳐 쌓고 안치하게 했다. 당시 영남지역에 또 다시 병화를 입자 대중들은 모두 마치 새나 쥐처럼 흩어져 달아나버려 불사(佛事)를 일으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때 송운 대사에게 일본을 다녀오라는 임금의 명령이 내려졌다. 송운은 이때 통도사에 봉안하려고 하던 사리를 받들어 원불을 삼았다. 
돌아온 직후 송운은 사리함을 고쳐 만들어 치악산 각림사에 두었는데 그 문도인 청진이 비슬산 용연사에 옮겨 봉안했다. 그뒤 대중들이 탑을 조성해 사리를 간직했는데 1과는 도로 통도사에 나머지 1과는 용연사의 북편 산기슭에 각각 봉안했다. 통도사에 처음 봉안한 지 940여년 뒤 왜적이 꺼냈다가 그들이 다시 돌려준 지 또 80여년 만에 통도사의 옛탑과 비슬산 용연사에 나뉘어 봉안돼 사리는 아무 탈 없이 여여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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