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담대종사는 현대불교의 지평을 확대한 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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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담대종사는 현대불교의 지평을 확대한 선지식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2.2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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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 현대 한국불교와 묵담대종사 - 김경집 진각대학원 교수<하>

묵담대종사문도회(대표 수열 스님)는 11월 28일 <묵담대종사, 그의 선.교.율> 출판 봉정식 및 학술대회를 춘강대강당서 개최했다. 이날 16명의 학자들이 묵담 대종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소중유품에 대해 발표했는데 이를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주>

 

지난 1974년 10월 26일 남원읍 남원리 선광사는 1957년 조계종정, 1975년 태고종정을 역임한 묵담 대종사를 초청, 대승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했었다.

 

#불교 대중화를 위한 노력
근대이후 한국불교에 있어 불교 대중화는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불교가 될 때 가치와 역량이 증가될 수 있기 때문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 대중화는 시대적 과제였다.
대종사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법의 근본으로 여기고 누구보다 한국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했다. 1957년 만암 종정을 이어 종정이 된 이후 선시를 발표하면서 불교대중화를 당부했고, 1959년 제18회 정기중앙종회 선시에도 현대적인 대중불교 운동을 광범위하게 일으켜 교세를 진작할 것이며, 포교, 전도, 역경사업을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종단의 재건에 크게 이바지하자고 주장했다.
대종사가 불교대중화를 염원한 것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불교가 대중화되면 한국불교가 지니고 있는 재래의 폐습과 부패성을 근절할 수 있고, 그런 영향으로 종권기구의 개편과 승풍쇄신 및 법요의식을 개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불교를 전면적으로 재건하는 일로 인식한 것이다.
대종사의 불교 대중화는 방향 제시로 끝나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이 주석하고 있던 지역의 불교 대중화를 위해 실천했다. 1922년 장성 백양사를 시작으로 50여 곳의 사찰 법회 법사로 사자후를 했다. 그 외 여러 지역에 도량을 창건하는 일에도 많은 기여를 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담양 용화사와 전주 관음선원 창건이다.
담양 용화사는 1934년 학신이 백양사 포교당으로 설립했으나 그가 입적하자 민가로 환원되었다. 그 후 대종사가 주석했던 백양사 청류암이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자 1956년 3월 담양읍 남산리 106번지 신도의 사택 660평을 매수해 사원으로 중창하고 용화사라 했다. 그 후 땅을 매입한 후 사찰의 소유로 헌납했다. 그 후 신도들이 전답과 임야를 희사하면서 담양의 포교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전주에서도 신도들의 도움으로 전주시 완산에 관음선원을 창건했고, 수선도량으로 만들고 탱화와 이륵존상을 그리고 대웅전 본존을 봉안하는 등 많은 기여를 했다. 이 밖에도 전주지역에 불교회관 건립되자 일반 대중들을 위한 일요법회를 열어 대승경전을 강의했다.

#불교 현대화에 대한 염원
근대 이후 한국불교 현대화의 핵심은 한문으로 되어있던 경전과 의례의 한글화였다. 그런 한글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분은 용성 스님과 권상노였다. 먼저 용성 스님은 3‧1 운동 후 옥고를 치르면서 다른 종교인들이 한글로 된 종교서적을 읽은 것을 보고 불교경전의 한글화를 뼈저리게 느꼈다. 1921년 출옥한 용성 스님은 여러 사람과 논의도 해보았으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적었다. 교단적인 차원에서 실행해야 할 과제였기 때문에 각 사찰에 공문을 보냈으나 협조하는 사람이 없었다. 용성 스님은 스스로 삼장역회를 결성하고 중요한 경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용성 스님은 불교의례도 한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어렵게만 느껴졌던 불교의식을 의역한 후 음률에 맞춰 재구성하여 출판한 것이 1927년 <대각교 의식>이다.
광복 후 불교계는 불전의 한글화가 시급하다는 인식하에 1945년 12월 해동역경원을 설립했다. 그해 김적음 주도하에 호국역경원이 설립됐다. 그리고 홍법역경회, 1949년 한글선학간행회 등이 발족했다.
교계의 중점 사업이었던 까닭에 기대가 높았다. 오백년 이래 일찍 뜻을 두고 이루지 못했던 조선의 문화사업인 한글 역경사업을 새로이 발족하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이것은 불교가 새로 살고 조선 문화가 새로 사는 길이요, 방법으로 여겼다. 교계에서 의식 있는 수행자들도 역경은 경전의 해방이라 표현할 정도로 그 의미를 크게 여겼다. 그리고 우리말로 누구나 보게 하는 그 임무는 국가에 일임할 것이 아니고 현 종단이 달성해야 할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미비했다.
호국역경원도 설립 취지와 달리 활동은 부진했다. 그 이유는 원장의 무관심, 무성의가 컸다.  역경사업의 중대성을 몰인식하고 적극 추진시키지 못한 총무원의 역량의 부재였다. 1948년 5월 이후에는 적임자를 선출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대종사는 한역경전을 국역으로 간행하는 일은 불교가 오직 우리 승려만의 불교가 아니요. 모든 사람이 함께 지닐 대중불교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다. 그런 대중화가 이뤄질 때 불교의 현대화와 불교의 생활화가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한글화로 이뤄진 현대화는 불교계가 당면한 역사적인 기본 과제임을 강조했다.
그런 인식 때문에 한글로 된 불교성전 간행에 많은 관심을 갖고 강력하게 추진한다. 1957년 3월 조계종 종정에 취임한 후 신교도를 교화할 때 필요한 불교성전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전남, 전북, 제주, 충정 등 각지에 연락해 구화 이백칠십환을 신자에게 희사 받아 임석진 충무원장에게 송금했다. 총무원은 권상노, 김동화 두 사람에게 대장경에서 원고를 수집해 불교성전 간행을 부탁했다. 두 사람은 근 1년 동안 4천5백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작성하고 지형까지 완료했으나 종단분규로 간행하지 못했다.
1970년 9월 부안에 사는 김호진이 간행하려고 살펴보니 총무원은 이미 1968년 전북교육감 최대섭이 인쇄하겠다고 해서 지형을 건네준 뒤였다. 그는 성전을 발간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형을 전당잡힌 상태였다. 이를 총무원에 알려 이자 십만원을 합친 삼십만원을 주고 지형을 찾아왔지만 인쇄권을 주지 않았다. 김호신의 탄원으로 이를 알게 된 대종사는 총무원을 질책하고 1971년 겨울부터 간행을 서둘러 1972년 1월 불교성전 3천부를 발간했다.

#근현대 한국불교와 묵담 대종사
묵담 대종사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불교사와 일치한다. 일제강점기 통치로 한국불교가 변질되는 시기에 출가해 수행했다. 광복 후에는 친일세력을 물리치고 한국불교 정체성을 세우는데 힘을 기우렸다. 승단이 갈등으로 방향을 읽었을 때는 조정자로 참여해 마지막까지 화합승단 건립을 희망했다. 그리고 그런 갈등 속에서도 굳건한 한국불교의 건설은 대중화와 현대화에 있음을 인식하고 몸소 실천한 선지식이었다.
대종사는 금해 율사의 법을 전수받아 해동 9대 율사로 계맥을 정리한 이후 율사의 이름처럼 철저한 지계정신으로 일관했다. 일제의 사법 개정으로 수행자 대부분이 대처식육하는 상황에서 청정한 수행자로 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23세인 1918년 백양사에서 대선사 법계를 받고, 37세인 1932년 대종사 법계를 받은 것은 남다른 수행 면모를 보여주는 일이다.
대종사는 광복 후 일제의 영향을 청산하고 새로운 종단을 설립할 때도 지도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감찰원장 소임을 맡아 무너진 수행풍토를 정립하는데 노력했다. 승단의 갈등이 안정된 이후에는 사찰정화대책위원으로 참여해 화합승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 노력은 1957년 종정이 된 이후에는 지속되었다. 그리고 1962년 통합종단이 와해되어 서로가 반목할 때도 종단의 어른으로 화합 승가를 위한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지도자였다.
대종사는 일찍부터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법의 근본으로 여기고 한국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위해 헌신한 선지식이었다. 다른 어떤 불사보다 불교 대중화를 염원한 것은 그 일이 일제에 의해 훼손된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는 일이며 한국불교가 세계화 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도 자신이 주석하고 있던 지역의 불교 대중화를 위해 실천했다.
대종사에게 있어 불교의 현대화는 근대 용성스님에서 시작된 한글화와 광복 후 종단의 역경사업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경전의 한글 번역은 불교가 승려만의 불교가 아니요,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대중불교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그런 현대화를 통해 불교의 생활화가 이뤄진다고 여긴 선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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