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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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법정스님>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1.0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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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새해를 맞아 불자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이번 호 사자후에서는 법정 스님이 전해주신 감로법문을 통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불자들은 항상 용서하는 수행으로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경책 또한 올곧게 새겼으면 합니다. <편집자주>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산에서 나오는 일이 무척 머리 무겁지만 여러분이 이렇게 오셨기에 그 무거움을 털어 버리고 왔습니다. 무엇이든 익히기 나름입니다. 익힌 대로 풀립니다. 저는 솔직히 안팎으로 어디에도 매인 데 없이 살고 싶은데, 출가 수행자인 까닭에 늘 시주의 은혜를 입고 삽니다. 물론 이곳에 와서 법문을 한다고 해서 시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무감에 산에서 나오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므로 할 말도 없습니다. 세상사라는 게 만나서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나와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몇 차례 다녀간 틱낫한 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대가 시인이라면 종이 안에 떠다니는 구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이 없으면 비도 없을 것이고, 비가 없으면 나무들은 자라지 못한다. 나무가 없으면 종이를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구름은 종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세상에 독립된 존재는 없다는 표현입니다.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이를 통해 그 안에 담겨 있는 관계를 넘어다보는 것입니다. 한 장의 종이를 통해 가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봅니다. 왜냐하면 구름이 없으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고, 또 비가 없으면 나무들이 자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이는 나무로 만듭니다. 나무가 없으면 종이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구름은 종이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모든 존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독립되어 홀로 존재하는 개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자식들이 태어나고, 또 그 자식이 짝을 이루어 후세를 낳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이 이루어지고 생명이 존속됩니다. 저마다 독특한 자기 세계를 지니고 그곳에 존재합니다. 
나무가 없으면 동물뿐 아니라 인간도 살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도량에 나무가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나무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숨을 쉽니까? 나무는 산소를 만들어 냅니다. 나무를 통해 집을 짓고 종이를 만듭니다. 나무 아래서 친구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나무 아래서 우주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나무만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그렇게 전체 생명계를 받쳐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어느 한 가지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모두 있을 자리에 있습니다.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서양의 인간 중심의 오만한 사고방식이 오늘날처럼 세상을 병들게 만들고 지구를 황폐화시킵니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인이고 모든 사물을 인간에 종속된 물체로 생각하는 발상이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병들게 합니다. 그 결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보다 많이 차지하기 위해 끝없이 전쟁을 일으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해 수렁에 빠뜨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질 만큼 가졌음에도 성에 차지 않아서, 더 차지하기 위한 욕심 때문에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새와 짐승, 물고기 할 것 없이 이 지구상에 있는 종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생물이 다 사라지는데, 이 지구상에서 인간만 달랑 남을 수 있습니까? 인간도 결국 사라집니다. 텔레비전과 냉장고, 가전제품, 자동차, 휴대전화만 가지고 사람이 살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독립된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서로가 주고받으며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실상입니다. 이 절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서 만났고, 이 절이 생기기 전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보고 듣는 것에 마음 팔리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상황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집니다. 늘 자기 안에서 찾고,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옛 스님의 글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옳거니 그러거니 상관말고
산이든 물이든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될 대로 됩니다. 다 제 길을 가게 됩니다.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참견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다. 극락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 망상을 쉬면 본래 자기 모습이 드러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선지식으로 생각하십시오. 누가 차갑게 대하면, 나 자신은 그렇게 차갑게 대한 적이 없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지난 봄 정기법회 때, 바로 이 자리에서 제가 용서에 대해서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얼마나 용서를 하셨습니까?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바쁜 세상에서, 이 좋은 날씨에 무엇하러 절에 옵니까? 되지도 않는 소리 들으려고 절에 옵니까? 귀만 아픕니다.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스스로 용서를 했는지 안 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최근에 제가 용서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대화집을 읽었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저서 중에서도 달라이 라마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책입니다. ……〈용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중국의 티베트 침략 전부터 달라이 라마가 잘 알고 지낸 한 스님이 있습니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을 떠납니다. 그런데 남아 있던 그 스님은 그만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18년 동안 감옥에 갇힙니다. 그곳에서 티베트를 비판하라고 강요받으며 온갖 고문을 당합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 스님은 요지부동입니다. 그 후 가까스로 석방되어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탈출합니다. 달라이 라마가 20년 만에 다람살라에서 그 스님을 만났는데, 옛날의 얼굴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감옥에서 그토록 고초를 겪었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달라이 라마가 스님에게 묻습니다. 
“스님, 18년 동안 그토록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두려웠던 적은 없습니까?”
그러자 그 스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 자신이 중국을 미워할까 봐, 중국인들에 대한 자비심을 잃을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나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었다면 과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입니다. 타인에 대한 용서를 통해 나 자신이 용서받게 됩니다. 또 그만큼 내 그릇이 성숙해집니다. 마음에 박힌 독을 용서를 통해 풀어야 합니다. 
“땅은 언제나 자비롭고 용서하며 너그럽다.”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대지를 어머니에 비유해 ‘어머니 대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거칠거나, 부드럽거나, 짓밟히거나, 허물어뜨리거나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대지입니다. 땅의 덕입니다. 이런 땅을 딛고 사는 우리는 이와 같은 땅보살에게 수시로 배워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눈을 밖으로 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 발 뿌리를 살펴야 합니다. 남이 못했든 잘했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과연 이 대지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맑고 향기롭게 살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땅의 덕을 배워야 합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일몰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전에 맺힌 것을 풀어서, 안팎으로 걸림없이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 짐을 다음 생으로 지고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그때 청산해야 합니다. 맺힌 것 때문에 자기 갈 길을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날입니다. 무릇 묵은 시간에 갇힌 채 새로운 시간을 등지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활짝 열리면 닫혔던 세상의 문도 따라서 활짝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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