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적 사회풍조와 불교의 대사회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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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 사회풍조와 불교의 대사회적 가치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1.2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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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드 실바

릴리드 실바 교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해야만 하는 사회 그리고 계속해서 욕망과 쾌락을 부추기는 현대의 사회풍조를 비판하면서 과소비와 쾌락을 부추기는 현대의 사회풍조를 이겨낼 수 있는 방안으로 불교의 철학적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어떻게 소비하고 어떻게 부를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불교적 입장이 불자들의 눈길을 끈다.<편집자주>

 

과학 및 기술의 발전은 현대인의 생활양식에 폭넓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20세기에 있어 그러한 변화가 너무나 급속하고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금세기가 과거의 모든 세기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다. 사람들의 태도, 가치, 목표 그리고 이상마저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우주, 인간, 사회, 문화 및 문명의 본질과 전개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기존의 확신들을 동요시키고 있으며, 서구의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전통에 대해서는 그 권위뿐 아니라 근거 자체마저 위협하고 있다. 
전통과 권위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게 되면 도덕적 가치의 타당성 역시 의문시되고 있다. 날로 새로워지고 있는 과학지식은 전통적 신념들을 차례차례 미신 또는 신화에 불과한 것인 양 조롱하면서 현대적인 것들이 훨씬 더 우월하게 보이도록 후광을 비쳐주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들의 생활양식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그래서 세대 차이의 문제가 전에 없이 큰 비중을 지니게 되었다. 과학적 지식이 사람을 문화유산으로부터 유리된 한낱 회의론자로 만든 반면에 기술은 사람에게서 창조적 능력을 앗아갔다. 
기계는 그 엄청난 생산능력으로 사람을 버튼이나 누르는 존재로 격하시켰고, 수백만 노동자를 직장 밖으로 내쫓았다. 노동자들은 근육의 힘과 창조력은 쓰지 못하고 거부당한 채 좌절감 속에 방치되고 있다. 그 결과의 하나로 각 민족정서의 승화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고유 민속미술과 공예가 거의 절멸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창조성을 찬탄하고 싶은 마음에서 또 자기를 표현하려는 가련한 몸부림에서 골동품 수집가로 변신해가고 있다.
그 다음으로 현대인을 완전히 짓눌러버린 힘은 상업화와 광고라는 폭군이다. 생산이 소비를 앞지르게 되자 미처 소비되지 못한 재고들로 체화(滯貨) 현상이 빚어지게 되었고 이를 해소하는 길은 사람들을 유인해서 더 많이 소비하도록 권장하는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근검의 기풍을 소비중심의 윤리로 전환시키려는 계산된 시도가 치밀하게 수행되었다. 
새로이 누리게 된 풍요한 생활수준을 유지해나가려면 소비를 증대시키는 것이 미덕이자 필요한 일이라고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대중매체가 동원되었다. 구매 동기심리와 행동심리학에 대한 조사연구결과, 인간의 유혹받기 쉬운 구석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리고 광고업자들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떼돈을 벌게 되었다. 그 약점이란 감각적 쾌락, 사유재산, 사회적 위세를 추구하는 인간 고유의 탐심이다. 이미 문화라는 안전장치가 끊어져나간데다 창조적 충동마저 좌절당한 현대인들은 대중매체의 매력있는 유혹에 넘어가서 방종한 생활로 곤두박질치게 된 것이다. 

릴리 드 실바 스리랑카 페리데니야 대학 불교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장부경 복주석서(Diigha Nikaaya A.t.thakathaatiika)』를 감수하여 런던의 빠알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에서 세 권으로 간행케하였고,「Paritta: 스리랑카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불교법어집」을 저술했다. 릴리 드 실바는 스리랑카 페리데니야 대학 불교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현대의 관능적 사회 풍조를 유발시킨 주요 원인들을 개관했으므로 이제 그런 풍조가 오늘날의 개인과 사회에 초래한 결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병(姓病)이 만연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지난 10년간 성병이 300배나 증가됐다는 보고가 있다. 정신의학 분야가 날로 넓혀져가고 있는 것도 정신적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알코올중독과 마약중독이 중요한 보건 문제로 대두되었다. 범죄율이 증가일로에 있다. 
부부의 연분이 서글플 정도로 쉽게 금이 가게끔 되었고 이혼율이 놀라우리만큼 높아졌다. 유아의 요람으로서의 가정의 기능이 위협받고 있다. 어떤 사회학자들은 과히 멀지 않은 장래에 가정의 기능이 끝나버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가정생활의 파탄이 가져온 가장 가슴 아픈 결과는 어린애들의 목숨에 끼친 영향일 것이다. 1976년 정월에 간행된「영국 보건 경제 보고서」는 1960년대 초 이후로 영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가장 주된 피해자는 바로 어린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은 가족 간의 관계가 긴장에 처한 이 시대에 부모가 저지른 유아학대의 제물로 사라져간 것이다. 10대의 마약중독과 소년범죄는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문제가 되었다. 
이상의 사회 현상들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직결되는 문제이며, 따라서 관능탐닉으로 인해 자멸하고 말 이 긴박한 위기에서 인류가 구출되자면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재고(再考)해보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하겠다. 
불교는 지난 25세기동안 무수한 사람들은 교화시켜온 커다란 원동력이자 지도원리였다. 현재와 같은 혼돈적 상황에 대해 불교가 어떤 빛을 던져주는지, 그리고 현대적 상황에서 순응하고 또 건전한 가정과 대인관계를 이루는 데에 어떤 지혜를 제공해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불교에 대해, 생을 거부하는 고행적 이상주의라든가 또는 반사회적, 반정치적이라는 등등의 비판의 소리가 때때로 요란하기도 하지만 불교 교단은 비구, 비구니뿐 아니라 우바새, 우바이의 남녀 재가신도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재가자의 지성적, 계율적 훈련은 승려의 그것에 못지않게 불교의 중요 관심사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인권이 보호되고, 인간적인 기업이라야 성공할 수 있으며, 자원이 잘 배분되고 정의가 최고의 권위를 행사하는 그러한 사회를 창조하려는 목표에서 독자적인 사회정치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트레버 링도 주장하고 있듯이 불교는 단순한 종교나 철학만이 아니고 사실상 하나의 총체적 문화로서 사람들의 세속적 및 정신적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어엿한 다면적 생활철학인 것이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의 포부는 부, 쾌락, 명성, 장수(長壽), 그리고 사후의 행복을 얻는 데에 모아진다. 이런 것들을 인간적 동경의 대상이자 인간 행위의 목표라고 받아들이면서 불교는 이런 목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생활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다보면 결국에 가서는 그 목표자체를 도로 무너뜨리게 될 위험성이 언제나 있다. 부와 성(性)은 쾌락을 얻는 두 가지 주요 수단이다. 이 두 가지를 신중한 태도로 대하면 여타의 세 가지 인간적 소망을 실현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오늘날의 사회적 병폐의 대부분 그 원인은 이 두 가지를 잘못 다룬 데에 있으므로 그에 대한 불교의 태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대단히 이로운 일이 될 것이다.
부를 대하는 불교의 태도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기 때문에 수입에 대해서는 상향선을 설정하지 않는다. 불교가 설정하는 것은, 부는 올바른 수단으로 벌어야 하며, 올바른 방식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남을 해치거나 속이거나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이마에 흘린 땀으로 번 돈이야말로 불교가 높이 찬양하는 바이다. 부는 어디까지나 도구적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다는 점을 항상 강조하고 있다. 
부는 첫째 자녀와 부모, 딸린 식솔, 친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면서 안락하게 살고 둘째 화재, 수재 등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에 대비하고, 셋째 친척, 손님, 국가에 대한 의무와 종교적 문화적 활동을 행하고 넷째 정신적 향상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데에 쓰여져야 한다. 각자의 분수에 따라서 크든 적든 간에 자신의 자산을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선용하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다.
불교에서 깊이 개탄하는 것은 과도하게 욕심스러운 탐심과 쌓아두는 습성이다. 인색은 경멸하나 검소는 미덕으로 칭찬한다. 낭비는 개탄할 습관이며 심지어는 반(反)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한번은 아난다 존자가 어느 왕에게, 승려들이 받은 보시물을 어느 정도로까지 활용하는지 설명해 준 적이 있다.
새로 옷을 얻으면 헌옷은 덮개로 쓴다. 헌 덮개는 좌복의 씌우개로 쓰고 헌 좌복의 씌우개는 깔개로 쓴다. 헌 깔개는 걸레로 쓰고, 낡아 너덜너덜하게 해진 걸레는 진흙에 이기어 금이 간 마루나 벽을 때우는 데 쓴다. 
불교 승려들이 자원을 알뜰하게 쓰는 모습이 실로 이와 같았다. 이런 검소한 기풍이 재가신도들에게도 자연히 파급된다. 어떤 부유한 상인은 액체 버터 한 방울이 마루에 떨어진 것을 보고 허비를 막고자 하인을 시켜 이를 담게 했다. 이렇게 알뜰한 사람이 보시를 할 때는 어떻게나 손이 크던지 받는 사람이 놀라곤 했다는 것이다. 스님들의 알뜰한 정신은 신도들이 배워 실천한 훌륭한 예가 되겠다. 검소함과 관후(寬厚)함이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이 두 가지 덕목은 따로따로 닦아서 함께 지녀야 할 덕목들인 것이다. 
이런 소박한 덕목들을 생각하다 요새 들려오는 소식들에 접하면, 한 예로 밴스 펙커드가 내놓은 획기적으로 눈을 틔워주는「낭비 조장자들(The Waste Makes)」을 읽으면 오늘날 과학시대의 지성인이란 사람들이 과연 제정신과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의아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일부 조사 연구가들의 계산에 의하면 지난 40년간 미국인이 소모한 세계자원만해도 전 인류가 지난 4,000년간 소모한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지구 자원은 결코 무한대가 아니므로, 후손을 염려하는 마음에서라도 현대인들이 생각을 바꾸어 불교의 경제적 습성을 일부라도 몸에 익혀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해양학이 발전되면서 미개척의 신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나 해양 역시 무한대가 아닌데 반해 인간의 탐욕은 끝도 없고 물리는 법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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