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목수와 기술자 제주에 이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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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목수와 기술자 제주에 이주해 ...”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1.2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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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불교 수용과 역사적 전개②-전영준 교수 (제주대 사학과)

지난 12월16일 탐라성보문화원 “한라산 영산재”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전용준 교수(제주대 사학과)의 ‘제주도 불교의 역사적 전개’ 그 가운데서도 사원수공업의 확산에 따른 고려시대의 제주불교에 대해 실었다.<편집자주>

 

 

발표를 하고 있는 전영준 교수

 

Ⅲ. 제주도 불교의 역사적 전개
1. 고려시대 탐라의 불교

고려시대의 불교는 국가 이념으로서 민중들의 생활 의식 및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의 사찰 지원은 통치적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제주불교 역시 고려 조정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 발전하였다. 제주도 사찰 가운데 대표적으로 법화사와 수정사의 경우 고려 시대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 국가의 지원을 받아 산남과 산북의 사찰들을 관리하는 비보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려 후기 창건된 존자암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성재를 지내던 비보사찰이었다. 
그러나 제주가 중앙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고려와 탐라의 관계, 고려에 편입된 지방정부로서 제주의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중앙정부의 행정적 간여가 있었던 1105년에 앞서서 제주에 많은 수의 사원이 창건되고 운영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058년에는 고려의 사찰도 이미 사찰이 조성되어 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925년부터 시작된 진헌이나 팔관회의 참여 등에 수반되었던 해상교통의 어려움을 종교적으로 풀어내고자 하였던 탐라민의 의지와도 일정한 관련이 있다. 아울러 고려후기 관영수공업의 쇠퇴와 사원수공업의 확산에 따른 소속 구성원의 기능이 제주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함께 검토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문헌상의 기록도 중요하겠지만, 사원수공업의 확산과 그에 따른 기능의 확대를 확인한다면 보다 명료하게 고려시대 제주의 불교를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보다 구체화하여 보면『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사찰은 수정사 법화사 영천사 묘련사 서천암 보문사 산방굴사 존자암 월계사 문수사 해륜사 만수사 강림사 소림사 관음사 등 15개소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원진의 『탐라지』(1651년)에는 수정사지 법화사지 원당사지 존자암지에 대한 기왕의 발굴보고서를 확인하면 대체로 10세기에서 12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다수 발굴되었고, 이를 근거로 사찰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전반기로 추정하고 있다. 
수정사의 초창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조선 태종 때까지도 비보사찰로서 130여명의 노비가 두어질 정도로 제주에서는 법화사에 이어 그 규모가 매우 큰 사찰이었다. 다음의 인용문은 당시 제주의 비보사찰로 법화사와 수정사가 운용되고 있음을 말하는 내용이다. 
의정부에서 제주의 법화, 수정 두 절의 노비의 수를 아뢰어 정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제주 목사의 정문에 의거하면 주의 경내에 비보사찰이 두 곳인데, 수정사에는 현재 노비 1백30구가 있고, 법화사에는 현재 노비 2백80구가 있으니, 비옵건대, 두 절의 노비를 다른 사사(寺社)의 예에 의하여 각 30구를 주고, 그 나머지 3백82구는 전농(典農)에 붙이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 두 사찰에는 각각 노비가 130구와 280구를 두고 있었는데, 이때의 결정으로 각각 노비 30구만을 두고 나머지는 전농시에 소속시키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기록만으로 보더라도 수정사의 위상은 고려 말에서 1408년에 이르는 시기에 가장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노비의 수가 줄어들게 되자 수정사는 법화사와 마찬가지로 수정사의 열세가 축소되었고 폐사될 때까지 비보사찰의 성격은 유지하였으나 그 위상은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수정사지 발굴조사는 1998년과 2000년에 이루어졌고, 조사된 유구는 건물지 12동, 도로와 보도, 탑지, 석등지, 담장지, 폐와무지, 적석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옛 수정사는 금당지를 가장 높은 곳에 두고 이 건물을 중심으로 중정 형태의 건물을 회랑식으로 배치했으며 중정 내에 탑과 석등을 두었다. 금당지를 축으로 보도, 문루, 종루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경사진 면을 다듬어 크게 세 개의 축대로써 각 건물간의 조화를 고려한 배치로 파악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은 북송대의 화폐와 11세기 청자류가 출토됨으로써 초창연대는 적어도 12세기 이전에 창건된 탐라 고찰(古刹)임을 고찰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사실은 각종 명문와와 함께 제작 시기가 이른 토기 및 시유도기, 자기류가 다량 출토된다는 점이다. 특히 기와는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쳐 사용되었던 일휘문 막새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정사의 초창 및 중창에 사용된 기와는 고려시대 와장들이 제작하였던 것으로 판명된다는 점이다. 130구의 노비가 있었다는 것과 조사된 12동의 건물지 유구를 고려하면 수정사의 초창과 여러 차례의 중수에는 고려의 와장이 직접 제작하였거나, 기와 제작기술을 습득한 이들에 의해 제주에서 직접 제작된 기와가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이것은 사원수공업의 확장과 관련하여 보면 더욱 명료해진다. 
법화사 또한 비보사찰의 위상으로 존재하였는데 규모상으로는 수정사보다 훨씬 컸다고 보인다. 총 8차에 걸친 조사에서 건물지 10동, 계단시설, 보도시설, 폐와무지, 담장, 추정 연지 등을 비롯한 수많은 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명문와를 비롯한 각종 기와, 청자를 비롯한 각종 도자기, 도기, 청동 등잔, 화폐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또한 법화사지는 총 4단계의 시설 변화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1차시기의 유물 중 ‘至元六年己已始重刱十六年己卯畢’의 명문와는 1269년 중창을 시작하여 1269년 즉, 13세기 중반 이전의 중요 유물은 開元通寶,法華經前燈盞此樣四施主朱景,銘 청동등잔과 청자양각연판문 대접, 고급 도기 등이다. 개원통보는 뒷면 상단에 초승달 모양이 새겨진 형식으로 이 양식의 사용 시기는 무종 회창연간(841~846)이다. 출토 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일부 도기 중에는 10세기 이전의 제작수법을 가진 것들이 있다. 청동등잔 또한 남송 때의 등잔과 유사하여 10~11세기 유물로 판단하고 있다. 또한 폐와무지에서 발견된 청자도 비교적 이른 시기의 녹청자 계열로 11세기경을 중심연대로 하는 것이어서 12세기 이전에 법화사가 운용되었음을 알려주는 고고자료인 것이다. 

종합토론에서 발표하는 전영준 교수


이처럼 법화사의 유물이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이고, 至元銘 명문와의 존재는 법화사의 초창을 미루어 짐작할 때 자체적으로 생산한 기와의 사용을 알려주는 내용인 셈이다. 즉, 상당히 고급 기물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미 사찰의 초창부터 건축자재로 사용되었을 기와제작은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렀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발굴된 용과 봉황문이 장식된 元式무기와는 배면에 포목 흔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의 와장에 의해 제작된 막새기와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막새기와를 사용하여 축조된 건축물은 원의 목수 및 기술자들이 제주에 이주하여 조영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원세를 비롯한 원의 기술자에 의해 원 세조의 피난궁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원의 기술자가 투입되어 제작된 원식기와나 원나라 상도 궁성에서 확인되는 주좌각원 주초석의 축조 및 용과 봉황문막새의 사용은 원나라 황실건축 기술이 그대로 적용된 건물이었음을 의미하여, 원 순제의 피난궁은 법화사 경내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원당사도 10세기 중반 경에 제작된 청자를 비롯하여 주로 11~12세기에 제작된 청자발과 청자대접을 근거로 창건 시기를 추정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수막새 2종은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실시된 제주목 관아지 발굴조사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이와 같은 원당사지에서 발견되는 평기와는 고려중기의 기와 제작수법을 보이고 있는데 온전한 상태의 기와는 적으나, 복원 결과 어골문과 결합되는 중심문양이 대부분 기와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중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묘련사지 조사에서도 출토된 명문와와 기와를 분석하여 고려중기로 그 창건시기를 잡고 있다. 특히 ‘同願此處官李員村’과 ‘萬戶李’ 등이 시문된 기와는 1991년 제주목 관아지 발굴조사에서도 출토된 일이 있으며, 1987년 제주시 외도동 수정사 절터에서도 확인된 일이 있음을 밝혔다. 특히 묘련사에서는 고려대장경의 판각과 관련된 유물이 송광사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각승 또는 판각승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상과 같은 각종 발굴보고서에서 공통적으로 전하는 내용은 주로 출토유물의 제작 연대가 비교적 이른 시기가 많고, 동반되는 명문와와 기와의 제작 연대가 거의 비슷한 시기가 주종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 기와들이 공통적으로 수습되는 곳 또한 제주목 관아지임을 밝히고 있어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관청 건물의 보수 및 중창에 사찰의 폐자재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규모가 방대한 관청의 조영에 필요한 물자의 공급은 중앙정부가 그랬듯이 제주에서도 사찰구성원의 조력을 받았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이것은 원 간섭기 이후 충선왕대 관영수공업체제가 무너지고 있음이 곧 민영수공업의 확산을 가져왔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그때까지 유지되면서도 더 확장되고 있었던 사원수공업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고려시대 제주에 존속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많은 수의 사찰의 보유하였던 자체적인 수공업의 기능은 지방정부의 재정에도 일정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초기 관청 건물의 대대적인 정비작업에는 여말선초 시기의 제주지역에 존재했던 사찰과 자체 내에서 운용되었을 수공업에 대한 접근을 달리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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