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려는 이를 위해 축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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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려는 이를 위해 축원하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1.3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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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무술년 새해의 달력이 한 장 넘어가면서 이제 곧 설입니다. 일가친척들이 한데 모여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덕담을 나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즈음해서 우리 마음을 되돌아보면 여전히 미워하는 사람, 싫은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요. 새해에는 그 싫어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축원을 하면 어떨까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성철 스님의 사자후를 통해 어떻게 원수 같은 상대를 부처님처럼 떠받들 수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편집자주>

 

성철 스님(1912~1993)성철 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아직까지도 20세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
이것은 원각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성불 못하고 대도를 성취 못하는 것은 마음속에 수많은 번뇌, 팔만사천 가지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번뇌 가운데서 무엇이 가장 근본되는 것인가, 그것은 증애심(憎愛心),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가의 3조 승찬대사가 그가 지은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증애심만 떨어지면 통연히 명백하도다.”
이 증애심이 실제로 완전히 떨어지려면 대오(大悟)해서 대무심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무심삼매에 들어가기 전에는 경계에 따라서 계속 증애심이 발동하므로 이 병이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대도를 목표로 하므로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 이것이 생활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가장 크게 죄를 지은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라,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입니다. 
‘나쁜 사람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또 모르겠지만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라 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나 하실 수 있는 말이지 다른 사람은 감히 이런 말조차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교에서는 ‘용서(容恕)’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고 잘못한 사람과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의 불성은 꼭 같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주장합니다. 성불해서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라, 죄를 많이 지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있는 중생이나 자성자리, 실상(實相)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겉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같이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을 일생동안 따라다니면서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제바닷타’입니다. 보통 보면 제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 하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찌됐건 그러한 제바닷타가 부처님에게는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부처님은 어떻게 원수를 갚았는가? 성불, 성불로서 갚았습니다. 
“죄와 복이 온 시방법계를 비춤을 깊이 통달했다.”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시 이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서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 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天地懸隔〕입니다마는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만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부처는 한 몸뚱이이면서 이름만이 다를 뿐,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비유하자면 겉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제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자성, 본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제바닷타가 성불한다고 법화경에서 수기하였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지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지침은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입니다.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물론 소나 돼지나 짐승까지도 근본자성을 성불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교 믿는 사람은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는 말입니다. 
옛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큰 잔치가 있어서 전국의 큰스님네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검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본시의 생활 그대로 낡은 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대궐문을 지나려니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다시 갔더니 문지기가 굽신굽신하면서 얼른 윗자리로 모셨지요. 다른 스님네들은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 스님은 음식을 자꾸 옷에 들이붓고 있습니다. 
“스님, 왜 이러시오. 왜 음식을 자꾸 옷에다 붓습니까?”
“아니야, 이것은 날보고 주는 게 아니야. 옷을 보고 주는 것이지!”
그리고는 전부 옷에다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비유입니까. 허름한 옷 입고 올 때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좋은 옷 입고 오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예전 인도에서는 조석으로 예불시간에 반드시 지송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지르제타’라는 스님이 지은 150찬불송이 그것입니다. 
의정법사의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에도 보면, 의정법사가 인도에 갔을 때 전국 각 사찰에서 150찬불송을 조석으로 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베푼 은혜 천지보다 깊어도 그걸 배반하고 깊은 원수 맺는다. 부처님은 그 원수를 가장 큰 은혜로 본다. ”
어떤 상대를 부모보다, 부처님보다 더 섬기고 받들고 하는데, 그는 나를 가장 큰 원수로 삼고 자꾸 해롭게 합니다. 이럴 때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상대를 더 섬긴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부처님을 해롭게 해도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상대는 부처님 허물만 보는데 부처님은 그를 은혜로 갚는다.”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근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잘 해주는데 상대방은 내게 잘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내버리고 자꾸 나를 해롭게만 합니다. 그런데도 섬기기만 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대를 받들고, 섬긴다는 말입니다.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부처님 근본사상이고 불교의 근본입니다. 
전에도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 몇이 삼천 배 절하러 왔길래, “절을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 반대하고, 예수님 제일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기원하며 절하시오.” 이렇게 말했더니 참 좋겠다고 하면서 절 삼천 배를 다 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네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이 극락세계에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절합시다.”
이제는 우리 불자들에게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는 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게 되면 일체 번뇌방상과, 일체 중생의 병이 다 없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이 모든 병이 다 없어지면, 그것이 부처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목표로 하고 사느니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그때 자기 감정에 치우쳐 살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의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치고 들어오는데 자꾸 절만 하고 있으면 불교는 어떻게 되나? 상대가 한 번 소리지르면 우리는 열 번 소리질러야 겁이나서 도망갈 텐데, 가만히 있다가는 불교는 씨도 안 남겠다. 자! 일어나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꾸 절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그런 사상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 보십시오. 불교는 바닷물 밀듯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화되면 모든 사람이 감동하고 감복하여 ‘불교가 그런 것인가!’하여 불교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애는 어느 곳에 있는가? 저쪽에서 소리지른다고 이쪽에서 같이 소리지르면 안 됩니다. 저쪽에서 주먹 내민다고 이쪽에서도 같이 주먹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불지른다고 같이 불을 지르면 함께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가져오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 붓는다면 어찌 그 물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은 물을 못이길 것입니다. 나중의 성불은 그만두고, 전술, 이기는 전술로 말하더라도 불에는 물로써 막아야지 불로 달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모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법문의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를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며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모든 일체 만법의 참모습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 무정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 성불입니다. 옷은 아무리 떨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귀한이나 천한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 다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 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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