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立春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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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立春 굿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2.0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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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향(붇다클럽 한라회 회원)

만설인 하얀 산에 달빛이 나뭇가지로 수묵화를 그린 모습, 달빛산행을 그리며 군대 동기 셋을 공항에서 만나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로 향한다. 
정유년 섣달 열이레, 구름 잔뜩인 밤하늘에 둥금을 조금 잃은 달이 우리와 숨바꼭질을 하다 내게 들켜 구름 밖으로 나와 휘영청 우리를 비춘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숙소에 들어 산행준비를 마친 후 02시15분에 알람을 맞추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 부스럭 소리에 잠이 깨어 등산복을 입고 문밖을 나서니 열이레 달은 술래가 없으니 심심한 가 두터운 구름 속 어디에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콩나물 해장국으로 배를 든든히 하고 성판악으로 향한다. 자동차 불빛에 하나둘 휘날리는 눈발을 보니 날씨가 심상치 않다. 내일이 立春이니 1만8천 제주의 여신이 백록담이 있는 부악(한라산 정상)에서 설문대할망(제주의 창조주)을 모시고 굿판을 벌이려나. 볼레로음악의 서막이 조용하게 시작하듯, 굿의 시작을 알리는 조용한 장구소리에 눈이 춤을 추는 듯하다. 
고지가 높아갈수록 눈발이 짙어가고 쌓인 눈에 앞서가는 순찰차 바퀴 자국이 선명하다.
성판악에 도착을 하니 점점 굵어져가는 장구소리에 눈보라가 고개를 뒤흔들며 춤을 춘다. 주차선이 보이지 않으니 어디다 주차를 할까 망설이다 지난밤 성판악에서 잠든 자동차 옆에 주차를 하며. . . 
‘잔뜩 기대에 부푼 동기들이 아니면 이 어둠과 눈보라에 설산에 들어야 하나’ 
立春 굿을 시작하려 1만8천의 여신들이 지난 시간의 흔적을 모두 감추어 숫눈의 깊이에 빠진 등산화가 보이질 않는다. ‘조금 있으면 눈이 좀 그치겠지’ 내 걸음걸이 가 좀 빠른가 보다. 
“캡틴 속도를 좀 늦춰”
걸음이 풀리고 어둠에 익숙해 질 무렵, 뒤를 따르는 헤드렌턴 불빛에 하얀 산에 그림자가 여럿이니 등산로가 어지럽다. 뒤따르는 불빛을 끄고 앞선 불빛만 등산로를 비추니 그림자는 오간데 없고 하얀 어둠 속에 설산이 더 잘 보임을 느끼는지. 
“야! 이게 더 좋다. 산이 더 잘 보이는데” 
숫눈에 빠진 발이 무거워 속밭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이 5시가 훌쩍 지났다. 눈을 털어내고 뜨거운 물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롯한 하얀 어둠을 느낀다. 
다시 배낭을 메고 내리는 눈보라에 허공도 하얀, 하얀 어둠을 걷는다. 사라오름 입구를 지나 진달래밭 산장에 다가갈수록 立春 굿의 소리는 짙어가고 북, 장구, 괭가리, 설쇠 소리에 눈발이 내려오다 올라가고 올라가다 내려오고 숫눈의 깊이는 깊어간다. 7시가 가까워 오니 뒤따르는 동기가 하얀 어둠속에서 여명을 느끼는지 
“캡틴, 렌턴 꺼봐” 
헤드렌턴을 끄니 하얀 어둠속에서 설산이 선명하다. 등산로를 걷다 설산을 걷는다. 아! 얼마 만에 느껴보는 하얀 어둠인가. 산에 들었는데 온 세상이 하야니 산도 없다. 숲속을 벗어나니 몰아치는 눈보라에 등산로의 흔적은 모습을 감추고 진달래밭 산장의 불빛만이 어둠 속에 우두커니 하얀 어둠을 지킨다.문을 열고 산장에 들어서니 산장을 지키는 지킴이가 성판악과 관음사에서부터 통제가 되었는데 언제 산에 들었냐고 호들갑이다. 잠시 이해를 구하고 안정을 찾은 후, 배낭 속 음식을 꺼내어 배 속을 채우고 부악을 바라보니 두터운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북, 장구, 괭가리, 설쇠 소리가 설산을 뒤흔든다. 
‘부악에 올라 立春 굿을 하는 神을 훔쳐보면 우리는 설산에 魂이 되겠지’
‘그런데 무슨 靈魂을 달래려, 무엇을 祈願하려 神들이 立春 굿을 이리도 크게 하는 것일까? 지난 몇 해 동안 나라에 큰 일이 있어 죽은 영혼을 달래려 그럴 것이다. 제2공항으로 너무나 혼란스러운 제주의 일이 잘 마무리가 되라고 그럴 것이다. 며칠 있으면 열리는 평창올림픽이 평화올림픽이 되라고 그럴 것이다.’   
산장에 20여분을 있었을까. 그새 쌓인 눈으로 올라온 흔적이 없다. 이제는 숫눈의 깊이가 발목을 감추니 내려가는 발의 무게가 올라온 발이 무게보다 더 무겁다. 
다시 속밭, 대피소에서 잠시 안정을 취하고, 성판악에 다가갈수록 굿 소리는 잦아들고 설산에 다녀왔다는 마음보다 立春 굿을 하는 설산에 든 마음이 죄스럽다. 우리가 立春 굿을 하는 설산에 들었다는 것을 神들도 몰랐으면 좋겠다. 
1만8천의 여신들이 부악에서 立春 굿을 올렸으니 戊戌年 새해에는 우리나라와 이 제주에는 평화가 깃들고 풍년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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