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좋은 해요, 날마다 좋은 날”
상태바
“해마다 좋은 해요, 날마다 좋은 날”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2.07 11: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화스님

곧 무술년 설날이다. 불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설날을 맞이하면 좋을까. 이번 주 사자후에서는 무엇보다 인생의 참뜻을 알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성자가 되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인생목표라고 한다. 청화 큰 스님의 상당법문을 통해 설날 역시 그와 같이 맞이하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해마다 좋은 해요,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편집자주>

 

청화 스님(1947~2003)1947년 세납 24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화상을 은사로 득도. 출가 이후 무안 해운사 두륜산 진불암, 지리산 백장암.벽송사, 구례 사성암, 용문사 염불선원, 보리암 부소대, 부산 혜광사, 두륜산 상원암, 월출산 상견성암, 지리산 칠불사 등에서 수행정진하심. 1985년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삼년결사를 시작으로 회상을 이루시고 대중교화의 인연을 지으심. 1995년까지 태안사 중창 복원하여 동리산문 재건하심. 미주포교를 위해 카멜 삼보사, 팜스프링 금강선원 등을 건립하심. 2003년 11월12일 열반.

 

상당上堂이라는 자리는 그렁저렁 상대 유한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상相을 떠나고 개념을 떠난 절대적인 말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예전에 어떤 도인은 지지리 애써서 상당에 모셔 놓았더니, 눈만 끔벅끔벅 하시다 법문도 하지 않고 내려와서는 가 버리더랍니다. 그래서 원주 스님이 뒤따라가면서 우리가 애써 모셨는데 왜 한 마디도 않고 가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도인은 “경을 잘 설하시는 데는 강사가 있고, 법을 잘 설하는 데는 법사가 있고, 나는 선사인데, 선사인 나한테 무슨 말을 하라고 하느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원래 부처님 법에는 묵은해, 새해라는 관념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약속으로 묵은 해, 새해를 정했을 뿐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운문 스님은 정월 초하룻날 원단의 상당에 올라가셔서 대중들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간 달의 소식은 묻지 않고 닥쳐오는 달의 소식을 물을 테니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즉 지나간 달의 소식에 대해서는 대중들에게 묻지 않고, 앞으로 도래하는 달의 소식을 한 마디 말해 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대중 가운데서는 한 마디의 말도 없었습니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물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운문 대사는 스스로 자문자답했습니다. “연년시호년年年是好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즉 “해마다 좋은 해요,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운문 스님께서 말씀하신 “해마다 좋은 해,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의 뜻은 과연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은 사람한테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운문 스님 말씀은 절대로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고 그런 사람들한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말씀입니다. 따라서 설사 지금 당장 아파서 곧 죽어 버릴 것 같다 하더라도 그 사람한테도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이 해당됩니다. 
불교의 팔만사천 법문, 그 모든 법문의 뜻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해마다 좋은 해, 날마다 좋은 날, 때마다 좋은 때입니다. 이렇게 해서 항시 행복한 것이 부처님 법의 대요입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인생의 모든 고통을 몽땅 소멸시켜서 정말로 위없는 행복을 체험하고, 자기 이웃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면 인생고가 충만한 우리 중생들이 날마다 좋은 날이 되고 해마다 좋은 해가 될 것인가? 오직 한길뿐 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바로 보면 날마다 좋은 날이고 해마다 좋은 해이며, 바로 못 보면 날마다 불행한 날일뿐입니다. 
사업에 이득을 좀 보고,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하더라도 이것은 결국 불행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그런 문제는 모두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것은 그 행복 ‘같은’것이지 참다운 행복은 못 되는 것이고 결국은 인생고로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가령 부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부자가 되기 위한 노력 없이 부자가 되었겠습니까? 갖은 고생을 다 합니다. 그런 가운데는 또 몹쓸 일도 하겠지요. 자기 양심에 가책된 일도 하고, 또는 남한테 원망도 받고, 자기 이웃은 배고픈데 자기만 배부르게 먹으니까 그 자체가 벌써 죄가 됩니다. 따라서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죄나 허물 위에 이루어진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모래 위에 쌓은 탑이나 마찬가지로 금방 허물어지고 맙니다. 좀 오래 간다 하더라도 자기 생명과 더불어서 흔적도 없습니다. 
상대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이면서 보편적인, 어느 누구한테나 어떠한 경우에나 어느 때나 행복하게 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운문 대사의 “연년시호년 일일시호일”이란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절대시간이 존재하고, 절대공간이 존재하는 우리 중생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육안으로 보면 내 몸뚱이가 이렇게 존재하고, 내 미운 사람이 대상으로 저렇게 존재하며,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존재하고, 또는 그렇게 욕심내는 감투도 존재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도 역시 존재하는 이런 차원에서는 날마다 좋은 날이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의 패턴, 의식을 전환시키지 않으면 성자의 보편적인 말씀이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하면 그냥 경우에 따라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지 않습니까?……
생사를 초월한 도리, 즉 우리 생명이라는 것이 현상적인 차원에서 입각해서 “오직 이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그런 것들이 최상이겠지만, 생사를 초월한 도리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석가족도 오히려 해마다 좋은 해고 날마다 좋은 날이 되어, 죽으면 당장에 천상에 태어나 인간세상보다 훨씬 고통이 적은 곳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이니 당장에 깨달아 버리면 오죽 좋겠습니까만 그렇게 안 되므로 공부를 하거나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서 고행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부처님 법을 어떻게 닦아야 본래 부처의 자리, 생사를 초월한 자리를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냥 그렁저렁 닦아서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대체로 모두가 다 범부입니다. 범부는 자기의 본바탕도 모르고 우주의 본질도 모릅니다. 석가나 달마 스님, 혹은 서산 대사나, 공자, 예수, 노자와 같은 분들은 우주의 실상과 자기의 참정신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자가 아닌 사람들은 본바탕을 못 봅니다. 본바탕을 보게 되면 본바탕하고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자입니다. 곁에 뜬 그림자와 같은 현상만 보는 사람들은 성자가 못 된 우리 범부중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범부중생 차원에서는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그냥 쉽게 본바탕인 우주와 인생의 본 생명자리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쉽게 볼 수가 없으면 차라리 그렁저렁 살면 될 것이지, 출가도 하고, 자기 가족을 떠나 와서 선방에 들어앉아 애쓸 필요가 있을까?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 현실적으로 사는 것인데 돈도 많이 벌고, 모두가 다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하는 이런 때 선방에 가만히 앉아서 지내는 것은 그야말로 지독히 비생산적인 것이 아닐까?”이렇게 느끼는 것이 지금 현대식 사고방식입니다. 
물질만능주의나 권력만능주의, 혹은 황금만능주의자인 우리 견해로는 절에 가서 공부하는 것은 아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같은 스님네들 가운데도 사회에 나가서 참여도 하고, 도시에 나가서 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아파하고 그래야지 산중에서 자기만 좋자고 공부하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런 때일수록 꼭 바른 견해를 가지셔야 합니다. 우리가 산중에 있건 도시 가운데 있건 그 처소는 문제가 아닙니다. 도시에 있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처소가 문제가 아니라 성자가 되기 위해서 바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교육자가 교단에서 자신과 학생들의 성불을 위해서 애써야 되는 것이고, 부모님들은 가정에서 자기 자녀와 더불어 성불하기 위해서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 못하면 또 허물 많은 공산주의 국가가 나오고, 허물 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나와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돈이 제일이고 물질이 제일이고 권력이 제일이고 자기 몸뚱이가 제일이고 자기 가족이 제일이라고 생각할 때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영달을 위해서는 별스러운 짓을 다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슨 주의가 생기고 무슨 운동을 하게 됩니다. 자기 국가만 좋아지고 자기 민족만 좋아지는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말입니다. 
성자의 길, 예수나 석가 혹은 공자가 가신 그러한 길을 벗어나 현상적인 것을 진실로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인생은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며, 나를 위해서 남을 해치고, 그렇게 싸우고 아귀다툼하다 끝나버립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범부의 껍데기를 벗어야 합니다. 싫든 좋든 간에 중생심을 꼭 벗어나야 합니다. 끝내 못 벗고 그대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몇생 몇만생 가서라도 끝내는 다 벗고 맙니다. 금생에 잘 못 살면 지옥에도 가고 아귀로도 가고 하면서 윤회의 고통을 계속하여 받게 됩니다. 분명히 윤회는 있습니다. 개미나 구더기가 될 수도 있고, 땅벌레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지옥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계속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모두 윤회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늦으면 늦을수록 그만큼 고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