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중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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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중들 속으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2.1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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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불교 수용과 역사적 전개③-전영준 교수 (제주대 사학과)

지난해 12월에 열린 탐라성보문화원 세미나에서 전영준 제주대 교수가 발표한“제주도의 불교 수용과 역사적 전개”마지막 편으로‘조선시대 제주불교와 훼철’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18세기 이형상 목사의 불교와 무속에 대한 탄압 속에서도 오히려 불교는 민간신앙과 깊숙이 습합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편집자주>

 

주제발표를 하고 있는 전영준 교수.

 

조선시대 제주불교와 훼철

고려시대 때부터 사원에는 자체적으로 필요한 승물(僧物)의 제작이나 토목공사에 투입되었던 수공업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고, 전 시기에 걸쳐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제주도의 경우에는 일찍부터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사원의 존재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사원수공업 기능은 중앙에서와 같이 일찍부터 운용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이와 더불어 고려 숙종 10년에 고려의 지방행정 체계에 편입된 제주에는 중앙에서 전승되었을 수공업 기능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을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 이루어진 홍화각이나 관덕정의 수축에는 사원의 기와수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능적 요소가 더해졌을 것이라 판단된다.『신증동국여지승람』【궁실】항목의 홍화각과【누정】항목의 관덕정에 대한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가) 
성 안에 있는데, 崔海山이 세운 것이다. 곧 옛날 안무사의 營인데 지금은 절제사의 營廳이 되었다. 高得宗의 記에, “…다음 해에 풍우가 철에 맞게 내리고 순조로워 곡식이 풍년들어 백성은 배를 두드리며 즐기고 말은 크게 번식하였으니, 우리 전하께서 어진 사람을 가리신 은혜가 깊고 또 지극하다. 공이 정사가 성취되고 인심이 화평해지자, 관청의 퇴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수축하려고 문을 닫은 절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먼저 거처하는 집을 일으키니, 거문고 치는 당과 욕실 부엌 낭사의 위치가 갖추어졌다. 조금 서편으로 집 세 칸을 세워서 당을 만들고 또 그 서쪽에 집 세 칸을 세우고 겹처마로 보충하니, 그 규모가 광대하고도 정밀하고 그 제도가 웅장하고도 화려하였다. 그 남쪽에 半刺(군의 보좌관)의 당을 세우고 그 북쪽에는 나라에 바치는 말의 마구를 두고, 동쪽에는 창고를 두고, 서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또 그 남쪽에 따로 門樓를 지어 아래로는 드나들게 하고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았고, 藥창고와 旗두는 곳이 동서에 서로 대치하게 하였다. 모두 담으로 둘렀으니, 집이 도합 2백 여섯 칸인데 집들이 서로 연접하지 않은 것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그 경영과 위치와 제작이 적당함을 얻은 것은 모두 공의 지시와 계획에서 나왔다.”

홍화각의 중수 때 같이 마련된 건물은 모두 206칸으로 상당한 규모를 보인다. 많은 건물을 중수하거나 신축할 때에는 당연히 상당한 양의 건축부재를 필요로 하는데, 기와 또한 상당량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홍화각 중수에 폐사된 사찰의 기와를 사용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사용처가 담장지에 제한적으로 쓰였다는 발굴 결과를 반영한다면 신축 건물에 쓰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기와는 새롭게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용문에서와 같이 기와를 직접 구웠다는 내용은 없으나, 206칸의 건물에 필요한 기와의 공급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으므로 대규모의 생산이 가능한 와요 또는 생산시설이 동시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때의 기와제작에 참여했던 장인들은 대체로 사찰에 소속된 僧匠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왜냐하면 조선 건국 후 중앙정부는 관영수공업의 복구에 집중하고는 있었지만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고 지속적으로 사찰수공업의 지원을 받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제주사회의 경우에도 관청에 소속된 장인이 동원되었을 가능성보다는 사찰에 소속된 승장이 관급공사에 동원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
弘化閣 남쪽에 있다. 辛淑晴이 세웠고, 成化 경자년에 목사 梁瓚이 중수하였다. 
辛碩祖의 기문에, “동지중추원사 高相公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 제주가 비록 먼 곳에 있으나 특별히 성스러운 임금의 덕화를 입어서, 가르치고 다스려서 文에 대한 일이나 武에 대한 방비가 모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安撫使營 남쪽에 射廳 한 구역이 있는데 사졸을 훈련하는 곳이다. 예전부터 집이 없어 보기에도 장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로 추위와 더위에도 가릴 것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한스럽게 여겼다. 지금 안무사 신후가 정사를 시작한 다음해 무진년 가을에, 일이 닦아지고 풍년이 들어 노는 목수들을 불러서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굽고,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새 정자를 그 위에 일으키고, 이름을 관덕이라 하였다. 모두 세 칸이고, 앞 퇴를 달고 좌우에 날개를 벌려 넓게 하고 약간 단청을 가하니, 크고 넓고 선명하며 높고 화려한 것이 제도에 알맞아서 참으로 한 고을의 장관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기뻐하고 경사로 여겨 모두 사문에 의탁하여 뒤에 오는 사람에게 보이기를 원하니, 자네는 나를 위하여 그 전말을 써주게나,’하니 글이 졸하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나)에 의하면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 목사 신숙청이 군사들의 훈련청으로 창건한 건물로, 1480년(성종 11)에 목사 양찬이 중수한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던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기록에서는 가)에서 보이지 않았던 건축 工匠의 존재가 확인되며, 기와를 직접 구웠다는 내용도 확인된다. 이때 기와 제작에 참여하였던 이들의 소속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지만, 사찰 소속의 승장이거나 태종~세종 대에 사찰통폐합의 과정에서 放良된 승장들이 민간수공업의 와장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때문에 고려 후기에 무너진 관영수공업 체제가 복구되지 않은 조선 초기, 그것도 지방에서는 수공업자의 존재를 사찰이나 민간의 기술자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관덕정의 중수에 참여한 공장들은 이미 이전 왕조에서부터 건축 등의 토목공사에서 활동하였을 것이고, 도제교육의 틀에서 관련 기능의 전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울러 앞의 가)의 기록과 나)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홍화각과 관덕정의 수축 시기가 13년 정도로 꽤 인접하고 있다고 볼 때, 기와를 제작하여 공급하였던 수공업 장인들이 관영수공업에 속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이처럼 관덕정과 홍화각을 포함하는 관청 건물의 중수에는 재활용된 기와와 함께 새롭게 제작된 기와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지만, 건축 시기상으로 양 건물은 13년의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홍화각의 수축 때는 보이지 않던 와장들이 관덕정 수축 때 갑자기 동원되어 기와를 구워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이것은 이전부터 기와 제작과 관련한 공장들과 수공업 집단이 소속에 관계없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이들에 대한 지방정부의 인식이 수공업장의 동원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겠다. 
사원의 제주사회에 대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선종과 교종 양종의 종파를 병합시키고,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축소시켜 나감으로써 불교는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제주불교 역시 국가 체제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가의 지원이 중단됨에 따라 사찰은 단순한 개인적 신앙에 의지하여 유지되었는데, 특히 지방의 불교 사원의 존폐는 지방 관리의 영향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홍유손의「존자암개구유인문」에서 국가가 논을 주어 생산된 벼를 국성재의 경비로 충당하게 하였으나, 존자암에 대한 국가의 지원 중단으로 폐사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다. 또, 1520년 金淨은『제주풍토론』에서 “淫事와 함께 부처에 기울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묘사하여 당시 제주의 신앙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또「수정사중수권문」과 같이 사찰을 중창하는 일도 있었으며, 임제의『남명소승』(1577년), 김상헌의『남사록』(1602년), 이원진의『탐라지』(1653년), 이증의 『남사일록』(1680년) 등에 지속적으로 제주의 사찰과 불교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서 여전히 불교는 제주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형상의 목사 부임으로 불교가 침체되기 시작했다. 『탐라순력도』(1702년)의 「건포배은」장면의 신당 129곳과 사찰 5곳을 불지르고, 심방 285명을 농사짓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민들의 신앙을 전연 돌보지 않고 저지른 제주도 문화의 파괴행위였다. 
이형상은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129개 마을의 129개 신당을 철폐하도록 지시하고 관리들에게 철폐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불교에 대한 신앙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토착화되었다. 이형상 목사의 불교 훼철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승려와 심방들은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개인적 신앙 형태를 갖게 되었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불교와 무교는 더욱 습합되는 현상을 띄게 되었던 것 같다. 이형상 목사가 사찰과 신당을 파괴하고 떠난 뒤 새로 부임한 이희태 목사(1703~1704)는 파괴된 신당을 다시 복구시키고 굿을 허용하였다는데, 이것은 지역 주민과 충돌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정치철학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더라도 18세기 제주 불교는 이전과 비교할 때 쇠락한 양상을 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정치적으로 제도권에서 밀려난 불교는 수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사상적 측면보다 신앙적 측면이 주를 이루면서 민중들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제주불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후 제주의 모속은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고, 제주도에서 정통 불교의 맥이 다시 살아난 것은 1908년 안봉려관 스님이 관음사를 창건하면서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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