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월출산 무위사 (2)
상태바
강진 월출산 무위사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3.14 11: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59)

 무위사의 아름다움은 고즈넉한 절 분위기에 있다. 과거에 있었던 절집들이 거의 복원되지 못해서 절집과 절집 사이 공간이 여유롭다. 그래서 관광지가 된 유명한 큰 절의 번잡함에 익숙한 순례자에게는 그 여유로움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원하게 트인 절 앞마당 구석에 있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 그늘에서 극락보전을 보노라면 어렸을 적 시골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즐기던 기분이 든다. 뛰어서 오를 수 있는 낮은 기단 위에 따스하고 단아한 느낌을 주는 극락보전이 만들어 주는 느낌이다.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 하는 단청이 다 벗겨진 기둥과 창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깔끔한 황토색 외벽, 이들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잿빛 기와가 조선시대 백자나 분청사기에 나타나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아니 꾸미지 않은 것이 아니라 꾸밈이 오랜 세월에 자연스럽게 질박한 아름다움으로 바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세월이 지난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건물이 좋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부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빛이 바랜 것은 다시 새로 칠하고, 깨어진 것은 다시 새로 보강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선인들이 만든 문화재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보수하지 않는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과거 선인들이 땀과 정성을 들여 만든 그 기술을 똑 같이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고 한다. 더욱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건물은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를 하기 때문에 함부로 보수하거나 시설을 설치할 수 없다. 사찰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지만 관리를 국가가 해주고 관광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불편함은 감수할 만하다.    

▲무위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삼존불상과 후불벽화


 무위사 극락보전은 국보 제13호로 세종 12년(1430)에 지어졌다. 과거에는 건축된 연대가 확실하지 않아 극락보전의 후불벽화 아래에 적힌 벽화가 그려진 1476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하였다. 그러던 중 1982년 건물의 처마가 내려앉아 지붕 일부 보수가 필요했고, 불상 뒷벽이 심하게 부식되어 후불벽 보존공사와 불단 수리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결국 1982년 11월부터 보수가 시작되었는데 보수 중에 목재에 붓으로 쓴 3행 88자의 글씨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을 통해 극락보전이 1430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건축 연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선 전기의 건축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외부 벽 단청은 대부분 색이 바랬지만 내부에는 단청이 잘 남아 있다. 대부분의 단청은 1956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칠해진 것이지만 처음 절집이 지어졌을 때 와 1526년에 칠해진 일부 단청이 남아 있다. 이 역시 조선시대 전반기의 단청 연구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중앙의 불단에는 극락보전이 만들어진 시대와 비슷한 때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만든 뒤 금칠을 한 아미타삼존불상(보물 제1312호)이 모셔졌다. 중앙의 아미타부처님 양 옆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앉아 있는데 대개의 보살상과 달리 발 한쪽을 내려뜨린 반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 왼쪽에 앉은 관음보살은 정병을 들고 있고, 두건을 쓴 지장보살은 긴 지팡이를 쥐고 있다.  
 극락보전 불단 뒤에는 후불벽화가 그려졌고 벽 뒷면에는 수월관음보살벽화가 있다. 원래 동쪽과 서쪽 벽에도 아미타불이 망자를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려오는〈아미타내영도〉와〈아미타삼존도〉,〈비천도〉등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중앙의 불단에 비해 동서 양 벽의 상태가 좋지 않아 결국 1975년 벽화보존각을 만든 뒤 동서 벽의 벽화 27점을 벽체 그대로 들어내어 벽화보존각으로 옮겼다. 중앙에 있는 후불벽화 아래에 적혀 있는 화기를 통해 벽화를 그린 화원은 대선사 해련(海連)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벽화 이외의 그와 관련딘 행적은 알 수 없다. 벽화는 아미타삼존도로 세로 270㎝, 가로 210㎝ 크기의 벽면에 아미타삼존을 비롯하여 6구의 나한 및 2구의 화불이 배치된 단출한 구도이다. 아미타삼존을 벽면 대부분을 차지하게 그리고 나머지 권속들은 작게 묘사한 삼존불 중심의 구도를 취하였다. 아미타불의 왼쪽에는 지장보살, 오른쪽에는 관음보살을 배치하였다. 원래 아미타불의 양 협시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지만 이 벽화에서는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로 바꾼 고려불화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관음보살은 화불이 있는 높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아 정병을 들고 있다.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얇고 투명한 옷을 걸쳤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서있는 지장보살은 두건을 쓰고 가사를 걸친 모습에 오른손에는 석장,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다. 두 보살 위쪽에는 구름 속에 상체만 드러낸 6구의 나한이 묘사되었는데, 두 분은 본존을 향해, 나머지는 서로 마주보며 서있다. 넓고 큼직한 육계에 작은 이목구비가 특징적인 아미타불의 얼굴과 옷 입는 법, 두건을 쓴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구불구불한 옷 주름 표현 등에서는 고려불화의 전통이 잘 나타나 있다. 단순한 옷 문양과 키 모양의 광배, 본존불 가슴 부근까지 올라온 협시보살 등은 조선 초기 불화에 새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러한 사항에서 이 불화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그려진 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 무위사 극락보전 뒷벽 〈수월관음보살 벽화〉


 불벽 뒷면에는 수월관음보살벽화가 그려졌다. 아미타삼존 후불벽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백의를 입고 있는 관음보살은 일반적으로 여성적으로 그려지는데 여기에서는 어깨가 큰 다분히 남성적인 느낌이 강한 보살로 묘사되었다. 대개의 수월관음도에는 관음보살의 발아래 관음보살에게 예배하는 선재동자가 그려지는데 이 그림에는 선재동자 대신 승복을 입은 노비구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에 대해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장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벽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극락전이 완성된 후 한 노인이 나타나 불화를 그리겠다고 한 뒤 49일 동안 법당 안을 들여 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그림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궁금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어 몰래 들여다보자,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노비구의 어깨에 앉아서 관음보살을 보고 있는 새가 날아갔다는 파랑새일지 모르겠다(원래 관음보살도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물고 있는 파랑새가 그려진다).  
 극락보전은 극락을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곳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에서 600년 가까이 된 불화를 보며 돌아가신 영가를 생각해 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