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마음 쓸 수 있다면 그 자리서 바로‘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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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마음 쓸 수 있다면 그 자리서 바로‘성불’
  • 김은희 기자
  • 승인 2018.03.1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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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스님

연미마을 천진암 수행법요집 봉정식에 증명법사로 오신 전 해인사 주지 보광 스님이 감로법문을 펼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업을 녹이고 청정해질 것인가. 스님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수도장으로 삼아 심장에 박히도록 애를 써야 한다고 말하십니다. 그래야 뿌리가 내리고 꽃이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편집자주>

 

 

 

 

불교는 기초, 기본에서 보면 전부 다 인연법, 인과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주 삼라만상이 거미줄 같이 얽혀있는데 다 인연법으로 얽혀있다고 부처님이 제일 먼저 천명하셨습니다. 
그 전까지는 창조주인 조물주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운명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신에 의해서 조물주에 의해서 내 자신이 좌지우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지극정성으로 받들어 모시고 순종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출현하시고 그 전통을 일언지하에 깨 부셔버렸습니다. 
그게 바로 인연법입니다. 그렇게 인과법, 인연법이 한 100년 전에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입증했습니다. 가타부타 할 것도 없는데 우리는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니고, 천하에 과학이 제일이라 했어도 부처님 법 앞에서는 알고 보니 부처님의 학설에 도저히 따라 갈 수도 없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냐하면 기본 불교가 이런 정도로 대단한데 명색이 불교를 믿고 부처님 제자인 우리 모두는 부처님 법이 대단한 줄 절감을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룩한 법을 만났는데도 말입니다.
무상심신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나는 만났다 이거라, 그러니 여기에 만났다는 다행함과 즐거움이 넘쳐서 환희가 받쳐 올라오면 지난 억겁의 때가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환희심 나도록 부처님 믿으면 우리 모두가 억겁의 모든 때를 다 없애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니 참 쉽지요. 그래서 옛날 선사들이 부처님 법은 별로 기특할 것이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별 것도 아닌가봐 이렇게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당연해서 옳고 옳아서 좋다 나쁘다를 뛰어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특별할 것도 없고 너무나 보편하고 타당하고 원만한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큰 횡재나 가피나 그런 것을 얻으려고 보편적으로 불교를 믿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한테 다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세계, 청정한 법계에서는 본래부터 중생이 없다 는게 대 원칙입니다. 여기에 방점을 딱 찍어버리면 불보살의 세계는 가타부타 못하는데 문제는 그러면 나 자신으로 돌아와 보니 나는 어떻게 되었나 이것입니다. 
아무리 따져도 나는 청정하지 못한 게 뭐이냐. 청정법계는 본래부터 중생이 없는데 나한테 돌아와 보니 나는 어째 중생이 되었나 이 말입니다. 거기에서 느슨하게 생각해 하루 이틀 중생되었나 이러거든요. 그러다보니 시작이 없거든요. 왜 시작이 없느냐 너무 오래 되어서 그 말입니다. 그러니 이걸 믿어야 되겠습니까 안 믿어야 되겠습니다까. 안 믿으면 불자도 아니거니와 자기만 손해라. 
누구에게 물어봐도 중생이 본래부터 있었지 뭐, 이리되면 부처님말씀이 아무 소용이 없거니와 부처님은 답답할 게 하나도 없고, 누가 답답합니까. 바로 우리 본인이 답답하잖아요. 중생업을 벗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라. 어찌 손해냐, 꿈이 크고 야물어가지고 택도 없이 극락 간다고 꿈이나 꾸고 지 앞 가름도 못하면 천당가겠다고 야단들이라.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적에 좀 안타까운 얘기지만 “내가 사바세계에 팔천 번을 왕래하면서 중생을 제도하고 가도 중생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 같으면 그만두겠어요, 자꾸 투자하겠어요. 보통사람이 아니라 웬만한 도인, 성인도 다시 돌아보겠어요, 안 돌아보겠어요. 부처님은 거기서 사바세계는 다시는 돌아볼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나와 같은 부처님이 천불이 동시에 출현해도 사바세계의 중생은 그냥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중생 숫자가 너무도 많고, 또 부처님 법이 아무리 그렇게 수승하다해도 듣지도 않거니와 들어서도 믿기지 않으니 어떻게 제도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어디에 결론이 있느냐. 바로 거기에 본인들이 부처님 법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핵심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대승법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거라, 불자들은 믿음 하면 가피, 감응, 영험, 운수, 재수 등을 계산하고 시작하지요. 그래서 부처님 앞에서 청구서 내밀기 바빠. 그리고 애써서 했건마는 법당 밖을 나가면 소용이 있나. 이게 자꾸자꾸 되풀이 하다보니 이제는 부처님이 잘못이라. 그러니까 이 절에는 영험이 없어, 그러니까 수소문을 해 보는 거라. 어느 절이 신도가 많고 영험이 있다더라 하면 그 절로 가는 거라. 그러다가 한라산 꼭대기까지 가도 소용이 없어, 육지로 나가는 거라. 그래도 안 되면 세계여행을 하는데 그렇게 평생을 헤매다가 끝내버립니다. 
그러면 핵심은 뭐이냐, 자기 자신을 죄를 인정하고 자기 무능을 인정하고 내 업을 뜯어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육조 스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육조단경 서두 첫줄은 “모든 선지식들아! 청정한 마음으로 반야바라밀다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잊지 말아라” 그게 육조단경의 전체의 뜻을 내포한 것이고 또한 수행자들이 꼭 명심해야 될 대목입니다. 청정한 마음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청정한 마음에 반야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반야라는 것은 모든 결단의 뜻이 있지 않습니까. 옳고 그름을 마치 칼이 잘라내듯이 반야를 칼에다 금에다 비유한 겁니다. 결국 아닌 것은 타협할 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선업은 죽어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라야 만이 중생의 업보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수행의 근본인데 그거 모른 사람은 없는데 다음 줄에 뭐이냐, “선지식들아! 우리 보리자성이 본래로부터 청정하다” 이 말입니다. 본래 청정 이것이 다른 뜻이 없고 믿음이다. 얼마나 청정하냐, 부처님의 자성이나 우리의 자성이 똑 같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출현하시면서 제일 먼저 내가 성불해놓고 보니까 일체 중생의 모든 성품과 나의 성품이 똑 같다. 어떻게 같으냐, 간단명료하게 청정하다. 보리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다만 오로지 오직 이 마음을 믿을 수 있다면 청정한 마음을 쓸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성불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소승법이 아니고 인과법도 아니고 최상승법이라고 합니다. 시간도 용납도 안 되고 장소도 용납이 안 되고 뭐만이 있을 수 있느냐,오직 일심만 있으면 됩니다. 
여러분들도 기도를 하건 참선을 하건 일념에 이르면 앉은 자리에서 성불할 수 있다는 핵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일심 일념이 안 되지요. 왜 안 되는가. 귀바퀴에서만 왔다갔다 해버려, 여러분들 심장에 박혀버리면 성불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청정해지는가. 반야바라밀이 뒷받침해줍니다. 과거 생각도 하지도 말고 미래 생각도 하지 말고 뭐만 남는가 ‘지금’ 만 남아있습니다. 날카로운 송곳으로 무릎을 팍 찌르면 무슨 소리가 나는가. 거기엔 전후좌우가 없어 골수에 박히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그걸 바로 삼매라고 합니다. 임제어록에도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니 하는데 승속을 막론하고 주인공을 되라고 하는데 이건 아닌데. 문제와 뜻이 부합이 되어야 말이 되고 뜻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절에 일주일이 한 번이라든지 보름에 한 번이라든지 못 오지요. 강의는 몇 시간 듣고 참선은 몇 시간 쯤 합니까. 안하는 것은 아닌데 그 에너지 가지고는 업장이 깨질까 안 깨질까요. 영하 4~50도 얼어붙은 것은 한 여름이 아니곤 잘 안 녹아요. 우리 업장을 녹이려면 말할 수 없는 열량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가버리고 나면 좋게 말하면 자유고 나쁘게 말하면 지멋대로라. 좋게 말하면 할 일이 많아서. 부처님 법이 좋아도 할 시간이 없다 그래 결론을 내려버려요. 그러니 무거운 업이 어찌 해결이 나겠어요. 그러니 절은 뭣 때문에 오는가. 내가 모르고 아직 중심이 안 잡히니.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중심을 잡는 폼을 잡아야 됩니다. 연습을 좀 해야 됩니다. 폼을 가지고 나갈 적에 끝내 버려야 되는가. 수처에서 작주를 해야 하나. 주인을 짓는다는 게 아니고 주재를 지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관이 돼서 내가 핵심이 되어서 재라는 것은 재상 재라, 재상은 일국의 모든 정사를 처리하고 결정을 내리지요. 한 시간이라도 그것을 그대로 가슴에 안고 내 업은 누가 처리하고 결정을 내리겠어요? 내가 해야 하는 거라. 그거 바로 주인공이지,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라. 그래서 말과 뜻이 간단한 것 같아도 말과 뜻이 천지 차이가 나. 여기 와서 집중하고 정진하는 시간이 일주일의 한 시간이라도 그것을 그대로 가슴에 안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수처작주해야 한다. 어디로 가든지 그 생각을 흐트러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매사에 그 말입니다. 수처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우리의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 열 가지입니다. 이러한 곳에 항상 여기 와서 정진할 때  그 흐트러짐이 없는 그 마음을 유지를 하는 게  입처개진입니다. 흐트러짐이 없이 조금도 인정사정 두지 말고 냉철하게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32조도품 같은 데 보면 사념처가 돼야 사정근이 됩니다. 사정근,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사념처가 안돼요. 인과관계로 올라가는 겁니다. 첫 계단하고 윗 계단 따로 놉니까 같이 갑니까. 아랫 계단이 밑에 없으면 윗 계단이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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