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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만 살면 됩니다”

현대사의 질곡 같은 세월을 걸어온 제주불교계 산증인 봉암당 연종 스님이 3월 13일 숙환으로 영원한 광명 아미타부처님 품안에 안기셨다. 법납 77세, 세납 94세.
스님의 마지막 속세와의 인연을 놓아드리는 49재가 지난 3월 19일 초재를 시작으로 3월 26일 2재, 4월 2일 3재, 4월 9일 4재, 4월 16일 5재, 4월 23일 6재, 4월 30일 7재로 봉암사(구, 옹포 포교당)에서 봉행된다. 
이에 본지가 스님의 삶을 되돌아보고자 13년 전인 2005년 5월 부처님오신날 특집 인터뷰를 다시 싣는다. 스님의 법향을 제주 사부대중과 나누고자 한다.  <편집자주>

 

 

연종스님은
·1940년 한림 극락사에서 득도
·1941년 관음사 사미계 수지
·1950년 관음사 대교과 수료
·1955년 제주종무원 교무국장
·1965년 관음사 총무국장 
·1975년 일본선종회 제주도지부장
·1988년 일붕문도회 제주도회장
·1988년 일붕선교종 원로위원
·1989년 일붕선교종 제주종무원장
·1989년 일붕선교종 사정원장 
·1999년 일붕선교종 원로회의 의장
·2000년 일붕선교종 6대 총무원장 
·2002년 일붕선교종 제3세 종정

 

△스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요즘도 손수 자동차 운전을 하십니까.
=예전에 비해서는 기력이 많이 쇠약해진 것 같지만, 항상 부끄럽지 않은 생활, 겸손하고 남을 해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올해 제 나이가 여든 둘인데, 환갑이 넘어서야(64세 때) 운전면허를 취득했습니다. 운전을 하면 우선 나다니기가 편합니다. 또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계획했던 일들을 하려면 제가 직접 운전을 해야겠더군요.
△결례인줄 알면서도 출가동기를 여쭤봐야겠습니다.
=부끄럽지만 뭐 특별한 동기는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신경쇠약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절에만 가면 기분이 그렇게 좋았지요. 그래서 제가 열 일곱되던 해인 1940년에 한림읍 동명리 백양사 동명포교소(현 극락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주지스님이 조용성 스님이었고, 속가 누님인 장자선화 보살이 창건주였지요. 그렇게 1년 동안 공부도 하며 행자생활을 했습니다. 한번은 송만암 스님이 자선화 보살의 초청으로 동명포교소에 오셨는데, 물론 법문도 잘하셨지만 당신을 끝없이 낮추는 모습이 제 마음 속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오이화 스님이 은사스님이시지요.
=1941년에 관음사 포교당에서 오이화 스님을 은사로, 이회명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수지했습니다. 그 후부터 관음사에 있었습니다. 당시 함께 수계한 스님들이 호경·인수스님 등이었지요.
△이세진 스님 밑에서 공부하셨다고 했는데, 그때 당시 강원에서 함께 공부한 스님들이 기억나십니까.
=이세진 스님께 초심·예식 등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예식은 스님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요. 요즘이야 책을 보면서 하지만, 당시에는 천수경을 독송하더라도 제자들이 제멋대로 읽지 못하게 당신이 직접 전수시킬 정도였으니까. 그때 스님 밑에서 함께 공부한 스님들이 원인상·강동은·강순익 스님 등이었습니다. 관음사에서 촬영한 강원 수료식 사진이 있는데, 거기에 나와 있는 20여 명이 모두 이세진 스님과 오이화 스님께 수학한 이들입니다.
△유동산 스님께도 공부하셨다면서요.
=이일선 스님께서 계시던 정광사(지금의 제주시 철성통)에서 출퇴근하며 유동산 스님께 배웠습니다. 딱히 강원이란 명칭을 쓰지는 않았지만, 초심반·치문반 등으로 나눠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가 해방 전이었는데, 혜조암에 계셨던 법현스님과 도남에 강윤희 스님외에 4∼5명이 더 있었습니다.
△스님께선 주로 한라산 관음사에서 수행해오셨는데. 또 관음사 중창과 보현암 창건 등 많은 불사를 가까이서 지켜보셨습니다. 당시 일화를 들려주신다면.
=관음사 주지가 7명이나 바뀔 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총무 소임을 맡았습니다. 4·3사건 때 관음사가 소실되고 나서 9년 만에 ‘신 관음사’라 불렸던 보현암이 창건됐습니다. 당시 창건불사는 김영희·이방훈·이차룡·강원필·김왕진·강문빈 등의 거사들과 정대원각·강향규·임덕희 보살 등이 중심이었습니다. 또한 관음사 소실 후 관음사를 대찰로 지은 분이 국참봉의 딸로 알려진 학천 스님이었습니다. 1964년에 한라산 관음사를 기공했는데, 당시 관음사 재산을 노린 이들과 맞서 ‘상좌 상속권’을 주장해 관음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자화자찬 같지만, 어찌 보면 저는 제주불교에 있어서 산모 역할을 한 셈이지요. 제가 1935년부터 지금까지 모아온 이회명 스님의 필적을 비롯한 연도별로 정리된 사진 등 많은 자료들을 관음사 사적박물관에 자료로 남기고 싶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50년대 불교정화운동이 제주에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 제주는 어떤 분위기였습니까.
=한마디로 어수선했습니다. 정화 후에 스님들이 비구와 대처로 구분됐지만, 당시에는 대처라도 사상이 바르고 포용력이 넓은 정화 지지자는 불문에 부쳤지요.
저는 정화되던 해에 관음사 교무국장으로 임명됐는데, 비구와 대처의 갈등으로 관음사 포교당이 연일 긴장상태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밖에 나다니질 못했습니다. 
△스님은 대한불교일붕선교종 3세 종정을 맡으셨는데.
=서경보 스님이 1988년에 일붕선교종을 창종하면서, 스님과의 인연으로 사정원장·총무원장을 지냈고, 제 위로 서경보 스님의 상좌 3명이 돌아가시면서 네 번째인 제가 종정을 맡게 됐습니다.
△말법시대라 그런지 사회가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불교의 어떤 가르침이 이런 혼란을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백 마디의 말이 필요 없습니다. 오롯이 경전대로만 살면 됩니다. 그래야 법계의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특히 불살생계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바로 알고 그것을 살리고 보호하려는 마음가짐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야 개인과 지역, 국가, 세계의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스님께선 세수로 여든을 훨씬 넘긴 노구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수행력을 보여주시고 계신데, ‘사나운 범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다 물어간다’는 만암스님의 전법게가 떠오릅니다. 출·재가의 젊은 불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시지요.
=불자들은 항상 하심하며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자님들께 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약인(若人)이 수유정좌관(須臾靜坐觀)하면 승조항사 칠보탑(勝造恒沙 七寶塔)이라. 보탑(寶塔)은 비진화위진(非盡化爲塵)이나 일념정심(一念靜心)은 성정각(成正覺)이라.
어떠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불교를 하면, 즉 마음 맑히는 행동·하심하게 되면 모래수같이 금으로 탑을 만든다 해도 그 공덕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이 이렇게 닦은 공덕들은 남에게까지 깨쳐진 그 마음으로 다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스님 긴 시간 고맙습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렇게 나누고 나니 속이 후련합니다. 제주불교신문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누리에 가득하고 불자 여러분의 가정에도 만복이 깃들길 기원드립니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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