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달마산 미황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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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달마산 미황사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3.2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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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60)

남도의 끝자락 해남 땅끝마을로 가다보면 공룡의 등처럼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게 길게 늘어선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소백산맥의 끝자락이 두륜산을 지나 해남 땅끝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이름도 범상치 않은 달마산(達磨山, 489m)이다. 달마산은 그 경관이 뛰어나 예로부터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렸다. 그 산을 뒤에 병풍처럼 두른, 누구든 한번 보면 잊지 못하는 아름다운 사찰이 하나 있으니 바로 미황사(美黃寺)이다. 
 달마산 남서쪽 중턱에 자리한 미황사는 나지막한 경사지를 축대로 평평하게 만들어 건물들을 세웠다. 가지런한 축대와 그 위에 세워진 아담한 절집, 절 전체를 둘러싼 녹색의 동백나무와 소나무 숲, 멀리 보이는 달마산의 기암괴석이 잘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1990년대 이후 여러 건물들이 중축되었는데 그전에는 대웅보전(보물 제947호)과 응진전(보물 제1183호), 요사채 등 건물 몇 채만이 숲 속에 탁 트인 절터에 조촐하게 자리한 아늑한 절이었다. 숲속 부도밭에 있는 많은 부도들로 과거 번성했던 때가 있엇음을 추측할 뿐이었다. 
 미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로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이다. 절 옆 숲속에 자리한 부도밭으로 가는 길에 1692년(숙종 18)에 세워진 사적비가 있다.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비문을 썼는데, 미황사 창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달마산에서 내려다보는 남도 풍경 오른쪽 아래 숲으로 둘러싸인 곳인 미황사이다

 신라 경덕왕 8년(749) 8월에 돌로 된 배 한 척이 아름다운 범패 소리를 울리며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사람들이 배에 다가가면 배가 뒤로 물러나고, 사람들이 돌아서면 배가 다시 다가왔다. 이러한 얘기를 들은 의조(義照)화상이 제자와 마을사람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했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올라가 보니 배 안에는 금으로 된 사람(金人)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안에는 경전과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40성중, 53선지식, 16나한의 상과 탱화 등이 들어 있었고, 배에 있던 검은 바위가 갈라져 그 안에서 소가 나왔다. 의조화상은 이것들을 하선하여 봉안하였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배를 몰고 있던 금인이 나타나, 자기는 우전국(인도) 왕인데 금강산이 일만 불을 모실만하다 하여 불상들을 싣고 갔으나 이미 절이 많이 있어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던 길에 금강산과 비슷한 이곳을 보고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흥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의조화상은 꿈 속 금인의 말대로 소에 경전과 불상, 불화를 싣고 길을 나섰다. 소가 달마산 중턱에서 한 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가다가 크게 울며 넘어지더니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넘어졌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으로 쓰러진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해서 아름다울 ‘미(美)’자를 넣고 금인의 빛깔에서 ‘황(黃)’자를 딴 것이다.

▲ 미황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풍경달마산이 병풍처럼 미황사를 둘러싸고 있다

 사적기를 쓴 민암은 “돌에서 깬 소와 금인의 이야기는 너무 신비해 의심스럽지만 연대를 따져 고증하는 것은 부당하다. 지금도 미황사에 경전과 금인, 탱화, 성상이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오늘날 미황사에는 이 설화의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유물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더구나 조선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물도 없으며 의조화상의 이름도 다른 데서 찾을 수가 없어서 사적기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 창건 설화에 대해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은 서남해안에 자리한 여러 사찰들에 전하는 것처럼 미황사의 창건설화도 불교의 남방 해로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증거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바다와 접한 지역이다 보니 육로보다 바닷길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이 제기된 것으로 여겨진다. 가능성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증거들이 나와야 한다. 
 창건 설화 외에 미황사에 대한 기록으로는 『동국여지승람』에 고려시대 스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전하고 있어서 고려시대에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적기가 쓰인 시기와 가까운 내용인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기존의 있던 건물들이 소실되자 이듬해에 만선(晩善) 스님이 중건하고, 현종 1년(1660)에 성간(省侃) 스님이 3창하였으며 그 후 다시 몇 차례 중수되었다고 것은 거의 맞을 것이다. 현재 부도밭에 있는 부도들의 주인공은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소요대사와 그 제자들로 이어지는 계보의 스님들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후기에는 절의 규모가 꽤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50년 전쯤부터 절의 규모가 오늘날처럼 작아졌고, 절에 대한 어떤 기록도 전하지 않는다. 인근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그 사이 미황사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유추할 수 있다. 150년쯤 전 미황사에는 40여 명의 스님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큰 중창불사를 위해 스님들이 연희패를 만들어 해안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여 시주를 모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공연하러 가던 배가 폭풍을 만나 침몰하면서 배에 탔던 스님 한 분만 빼고 모두 돌아가셨다. 절에 있던 나이 많은 스님 몇 분과 연희패를 만들며 투자한 빚더미만 남은 미황사는 그 이후 1940년대까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절이 되고 말았다. 미황사 인근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비바람이 치는 날에는 바다에서 북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이후 1989년 주인 없이 비어있던 미황사에 지운, 현공, 금강 스님이 오면서 미황사가 오늘날처럼 변모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그나마 남아있던 대웅보전(보물 947호)과 응진전(보물1183호) 주변에 흔적만 남아있던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자하루 및 요사채를 세웠다. 스님이 살고 향화객이 끊임없이 찾는 절이 되려면 오늘날처럼 여러 절집을 두루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잠시 머물다가는 순례객에게는 20여 년 전 대웅보전과 응진전 및 한두 채의 요사채만 덩그러니 있던 호젓한 분위기가 더 그립다. 새로 전각들이 세워졌지만 미황사는 여전히 여느 절보다 아름다운 절이다. 미황사에 가면 작년 개통된 미황사에서 시작하여 미황사로 끝나는 달마산 둘레길인 달마고도를 돌아보며 왜 산 이름을 달마산이라고 했으며, 과거 미황사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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