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항쟁 제주불교 적극 참여…그 피해 또한 막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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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항쟁 제주불교 적극 참여…그 피해 또한 막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4.1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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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금순 문학박사의 제주4.3항쟁과 제주불교의 수난 (4)

대한불교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는 지난 3월 1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미군정.정부수립기 불교의 사회참여 활동과 수난’이란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한금순 문학박사는‘제주4.3항쟁과 제주불교의 수난’이란 주제로 강연했는데 이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주>

 

 

2. 제주불교 사찰의 수난

제주4․3항쟁으로 피해를 입은 제주불교 사찰은 37개소가 조사되어 있다. 사찰 내에 있던 법당과 요사채, 객사 등의 사찰 내 건물 피해 위주로 조사되어 있다. 건물 이외에 불상 등의 피해는 이제 오랜 세월이 흘러 쉽게 조사할 수 없는 실정이다. 소개령으로 피난 할 경우 불상 등을 끌어안거나 등에 업어서 옮겨 다녔던 상황이 증언되고 있다. 불상과 탱화, 사찰 내 집기 등의 훼손은 사찰 건물의 피해 규모에 따라 발생되는 정도로 짐작하여 추산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 제주도에 제주4․3항쟁 이전부터 봉안하였던 불상과 탱화를 보유하고 있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점 또한 제주4․3항쟁기의 피해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사찰 건물의 피해는 1개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37개 피해 사찰 중 1개소인 함덕리 본원사는 무장대가 법당 일부를 태웠다. 본원사 주지의 아들 김병택이 경찰 간부급이라서 일어난 일이었고 마을 청년들에 의해 바로 복원시키기도 하였다.

사찰 피해 시기는 주로 1948년 11월경에서 1949년 2월에 걸쳐 주로 이루어지는데 토벌대의 무자비한 학살과 방화가 자행되던 초토화작전 시기에 해당한다.
사찰 건물의 피해는 사찰 경내의 모든 전각을 소각하고 불상 등의 집기까지 소각시키는 전소의 형태가 있고 불 질렀으나 일부만 소각된 경우, 건물을 사용할 수 없게 일부러 파옥시키는 경우, 그리고 소개령에 의해 접근을 금지당하면서 폐허가 된 경우, 강제 매각으로 뺏기는 경우 등으로 조사된다.

전소된 사찰은 18개소이다. 법당 요사채 객사 등 사찰내의 건물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소각하였으나 일부만 탄 곳이 2개소이다. 사용할 수 없게 하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파옥한 곳이 10개소로 지붕과 벽을 허물어 건물로써의 기능을 없애는 상태로 훼손하였다. 오랫동안 접근과 사용이 금지되면서 폐허된 곳이 4개소, 강제 매각 당한 곳이 1개소로 집계된다. 전소시킨 후 토벌대 주둔소로 활용하거나 육군훈련소 숙영지로 혹은 면사무소로 사용되는 사찰도 있다.

관음사 도량에 남아있는 4.3 유적

 


관음사는 무장대의 이세진이 승려인 관계로 무장대의 공격 교두보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관음사에 주둔하기도 했다. 1949년 2월 12일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관음사전투로 관음사는 토벌대에 의해 법당을 비롯한 7동의 전각이 전소되었고 불상 등이 불태워졌다. 불상에 불을 지르니 멀쩡한 날씨에 벼락이 내리치는 일이 있어 혼비백산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주지 오이화 등은 소개되어 관음사를 비워야 하였다. 이후 2연대 2대대의 주둔소가 되었다. 미군정 ‘G-2 보고서’ 등에 의하면 제2연대 제2대대 병력 800여명이 민간인들을 동원하여 폐허가 된 관음사 경내에 주둔지를 구축하였다. 숙영지와 초소 등 27곳의 방어유적과 7백~8백미터의 돌담으로 제1, 제2 방어선을 겹겹이 구축하였던 유적이 조사되어 있다.
1949년 4월 국방장관과 사회부장관이 대통령의 특명으로 관음사 주둔 제일선 장병을 위로 시찰하기도 하였다.
1955년까지도 관음사 터는 경찰유격대의 전초선 신선대 사령부로 사용되고 있었다.

제6차 기관장회의는 경찰국 주관으로 10일 녹음 짙은 구 관음사터에서 개최하였는데, 길 지사와 40여명의 각계 대표가 참석하고 내도중인 김세완 대법관도 임석하였다. …생략… 하오 1시 경찰국에 집합하고 사고의 길을 자동차로 달려 2시반경 구 관음사터에 도착 경찰밴드의 환영을 받은 일행은 신 경찰국장의 안내로 경찰유격대의 전초선 신선대 사령부를 방문하였다. 잠시 휴게한 후 3시부터 밤나무 그늘에 멍석을 깔고 도형으로 앉아 회의를 시작하였다. …생략… 회의를 마친 일행은 경찰에 의하여 명명되었다는 구, 관음사터 뒷산 해발 800미의 “평화고지”를 답사하고 US99식 소총으로 사격경기에 들어갔는데

경찰은 관음사 터 일대를 평화고지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관음사 인근 아미산 정상의 경계참호.

법화사는 전소 된 후 다시 법당과 요사채를 마련하였으나 1952년 2월부터 1953년 9월까지 육군훈련소 제3숙영지로 이용되며 사찰로써의 기능은 잃어버렸다. 선광사는 파옥시켰고 목재는 후일 남원중학교 건설에 이용되었다. 고관사는 1948년 11월 조천면사무소가 불에 타 업무를 볼 수 없게 되자 경찰이 총을 등에 들이대며 강제 매각 당하였다. 오라동 월정사도 전소되었다.
제주4․3항쟁기 제주불교의 수난은 제주사회상에 적극 참여한 결과였다. 이는 비단 제주불교만의 수난이 아니라 제주도 전체의 수난이기도 하였다.

Ⅴ. 맺음말

제주4․3항쟁에 제주불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살폈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만큼 제주불교의 피해 또한 막심하였다. 제주불교를 이끌던 인명의 피해는 오래도록 그 후유증이 컸으며, 사찰 건물 등의 피해 또한 재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근대 이후 제주불교의 중심지였던 관음사는 관음사전투로 인해 인명의 피해와 사찰 건물의 전소로 인한 피해로 제주불교 활동의 전체적인 어려움을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재건 과정 또한 1964년에 이르러서야 관음사의 재건이 시작되는 것으로 그 험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이일선, 이세진 등의 승려들이 직접적으로 제주4․3항쟁에 참여하는 활동으로 수장당하는 일이 있었다.
제주불교는 해방으로 친일을 반성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맞춘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활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제주4․3으로 인해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오늘날 제주불교는 제주4․3항쟁기 치열한 제주사회 참여활동을 그 기반으로 한 것임을 기억할 일이다. 그러나 제주불교계의 제주4․3항쟁에 대한 기억 활동은 4․3위령재의 봉행 정도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이는 제주도내에 4․3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 피해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한국불교도 한국현대사의 중요 사건인 제주4.3항쟁과 제주불교의 사회참여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함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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