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견 때문에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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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견 때문에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5.2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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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 사자후 (전 월정사단기출가학교장, 삼척 천은사 주지)

불기 2562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눈 푸른 납자로 한 생애를 살다가 깨우치신 성철 큰 스님이 그리워집니다. 성철 스님은 백일 법문에서 올바른 중도란 변견에 치우치지 않고 쌍차쌍조하여 진여대용이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편집자주>

 

 

성철 스님(1912~1993) 성철 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아직까지도 20세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부처님은 능인(能仁)이시니, 지혜가 있어 중생의 마음을 잘 헤아려 능히 일체 중생의 의심의 그물을 부수어서 유(有)와 무(無) 등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범(凡)과 성(聖)의 망정이 다 사라지며, 인(人)과 법(法)이 모두 공(空)하게 하신다. 
비견할 것 없는 법륜을 굴려 수량(數量)을 초월하니, 짓는 것에 걸림이 없어 사(事)와 이(理)를 함께 통달하셨다.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듯 문득 있다가도 없어져서 종적이 없는 것이 대적멸(大寂滅)이니, 속박에 있을 때는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는 대법신(大法身)이라 한다. 
법신은 다함이 없어서 체(體)가 증감이 없으나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니, 물속의 달과 같다. 
도도히 운용하여 뿌리를 세우지 않아 유위를 다하지도 않으며 무위에도 있지 않으니 유위는 무위의 용이고 무위는 유위의 의지처이다. 그러나 의지하는 데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저 허공처럼 의지하는 곳이 없다고 한다. 
《마조어록》

능인(能仁)이란 석가(釋迦)를 의역한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고 한 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부처님의 방법이 참으로 묘하여 일체중생의 의심, 유에 묶이든 무에 묶이든, 변견에 떨어져 있는 것을 모두 부수어 거기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결국은 중도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입니다. 유무 등의 결박을 벗어나야 중도이고 그 외에 중도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유무 등의 결박을 벗어나 중도를 성취하면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정(情)이 모두 없어져서 완전히 쌍차(雙遮)가 됩니다. 인(人)․ 법(法)과 아(我)․ 법(法)이 함께 공(空)합니다. 아와 법도 양변이고 범부와 성인도 양변입니다. 누구든 실제로 법을 알려면 유무를 완전히 떠나 범부니 성인이 하는 망정이 사라지고 인과 법이 모두 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무등륜(無等倫)’, 즉 비견할 것이 없는 법륜이란 위도 없고 비교도 할 수 없는 최상의 법륜을 말합니다. 그런 무등륜을 굴린다는 것은 쌍조(雙照)하여 대용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진여대용이 무애자재하게 법을 펼치면 수량을 뛰어넘어 버립니다. 변견으로 법을 설하면 언제든지 상대가 있고 한계가 있어서 결국 생멸에 그치고 맙니다. 
하지만 생명을 떠나서 중도를 성취하면 쌍차쌍조가 현전하여 진여대용이 발현하지 않으려 해도 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장무애한 법계, 진여대용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이것은 수량으로 논할 수 없는데, 한계와 분별을 완전히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는 일마다 걸림이 없어서 사(事)와 이(理)가 쌍통(雙通)합니다. 사와 이를 거론하면 교를 말하는 것 같지만 선(禪)도 불교입니다. 선도 부처님 법이지 다른 법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리쌍통(事理雙通)’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무애라 하든 사사무애라 하든 상관없습니다. 사와 이가 쌍통해서 전체가 무장애법계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과 같은가? 하늘에 구름이 일어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며 종적을 남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 무엇과 같은가? 물 위에 글씨를 쓰는 것과 같아서 물 위를 손가락으로 그으면 문채가 일어나지만 그을 때뿐이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변화가 자재하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누구든지 양변을 떠나 쌍차쌍조해서 진여대용이 현전하면 융통무애하고 변화자재하여 참으로 대자유가 눈앞에 나타나니, 이것이 바로 불법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입니다.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닌데 생멸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생의 변견일 뿐입니다. 중도에 입각해서 보면 불생불멸이니, 이것이 대적멸입니다. 적멸이라고 해서 적적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쌍차가 곧 쌍조이듯, 여기서 말하는 적멸은 대광명입니다. 대적광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표현을 어떻게 하든 쌍차라 하면 으레 쌍조를 겸하고, 쌍조라 하면 쌍차를 겸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변견입니다. 
‘속박에 있다’는 것은 아직 대법을 성취하지 못한 때입니다. 중생이라 하든 보살이라 하든 뭐라 하든지 간에 아직 대법을 성취하지 못한 때, 즉 정각을 성취하지 못한 때를 말합니다. 변견 때문에 아직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유무병이든 뭐든간에 양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럴 때를 여래장이라고 합니다.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해탈하였다. 양변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도를 성취하니, 이러한 때를 대법신이라 합니다. 법신은 다함이 없어서 증감이 없습니다. 불생불멸이고 부증불감입니다. 
‘증감이 없다’는 것은 차변을 말합니다. 증감이 없으면 능히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크고 작음을 떠나면 크고 작음이 완전히 원융자재해집니다. 또 모나든지 둥글든지 원융자재하여 무애자재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대용전창(大用全彰), 즉 진여대용이 완전히 드러난 데서 하는 말입니다.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형(形)은 중생을 제도하는 모양을 말합니다. 물에 어린 달과 같습니다. 도도히 운용하여 뿌리를 세우지 않습니다. 뿌리를 세우거나 무엇을 재배하면 주처(住處), 즉 머무는 곳이 생기고 맙니다. 주처가 생기면 변견이 되는 겁니다. 
중도란 완전히 원융무애하여서 주처가 없습니다. 주처가 없기 때문에 무엇을 세우면 그것도 중도가 아닙니다. 부처라 하면 참 부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위를 다하지도 않고 무위에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유위를 버리지도 않고 무위를 취하지도 않습니다. 유위를 버리고 무위를 취한다면 취사했기 때문에 이 또한 변견입니다. 그래서 유위를 다하지도 버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위에 머무르지도 취하지도 않습니다. 
유위는 무위라는 집의 용(用)이고 무위는 유위라는 집의 의지처입니다. 결국 유위는 무위를 의지해 있고, 무위는 유위를 의지해 있습니다. 즉 유위는 묘유가 되고 무위는 진공인데, 진공을 제외한 묘유가 따로 없고 묘유를 제외한 진공이 따로 없다는 말입니다. 진공이 곧 묘유이고 묘유가 곧 진공이며, 유위가 곧 무위이고 무위가 곧 유위이며, 유가 곧 무이고 무가 곧 유입니다. 결국 유무가 합해서 융통자재한 중도대용 그대로입니다. 
그렇다고 의지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유위의 의지처’라고 해서 발 딛고 벽에 기대듯이 의지할 무엇이 있다고 알면 안 됩니다. 그러면 주처가 생겨서 중도가 부서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저 허공처럼 의지하는 것이 없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바로 중도는 원융자재하여 주처가 없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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