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연등회의 역사와 나아갈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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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연등회의 역사와 나아갈 방향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5.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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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상현 (동국대 박사)

1. 연등회의 오해와 이해

최근 대한불교조계종(이하, 조계종)을 중심으로 각 종단과 사찰에서 불교의례를 문화재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중요무형문화재 138개 종목 중 불교무형문화재는 제50호 영산재(1973), 제122호 연등회(2012), 제125호 삼화사 수륙재(2013), 제126호 진관사 수륙재(2013), 제127호 아랫녘 수륙재(2014) 등 5개로 3.6%에 불과하다. 연등회와 수륙재가 최근에 지정된 것은 그동안 불교계의 노력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확산에 따른 국내 문화재에 대한 제도의 보완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특별자치도(이하 제주도)의 문화재 현황을 보면, 2017년 12월 현재 지정문화재 총 388건 중 불교는 32건으로 8.2%를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무형문화재는 1건으로 0.4%에 불과하다. 1건은 도지정문화재 제15호 제주불교의식이다. 영산재가 불교음악을 주로 일컫는 범패(梵唄)라는 이름으로 1973년 11월 5일 지정되었다가 범패와 작법(作法), 장엄(莊嚴) 등을 통칭하여 본래의 명칭인 영산재로 1987년 11월 7일 변경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제주불교의식은 연등회, 영산재, 수륙재, 시왕각배재, 생전예수재, 요왕재 등 다양한 불교의식을 통칭하는 하나의 이름에다 보유자 1인, 전수장학생 2인 총 3명만 지정되어 있다.
국가적으로나 제주도에서도 여전히 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불교의 무형문화유산은 아직도 제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 못함을 확인할 수 대목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내외적 요인들이 있다. 내적인 요인들을 살펴보면 불교계에서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와 기예능에 대한 변별성 등 다양한 가치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과 불교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이 낮다는 점이다. 연등회와 수륙재 등은 사직대제, 석전대제, 종묘대제처럼 보유자나 이수자 개인으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대규모의례 보유단체로 지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불교의례를 개인이나 종단의 이해관계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최근 들어 각 지역과 사찰에서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연구활동과 무형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노력들이 경주되고 있어 서서히 그 인식이 바뀌어 가고 있다. 
이런 즈음에 제주도에서도 성보문화원을 중심으로 영산재와 연등회 등의 무형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재 지정을 위해 한걸음씩 다가가려는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면면히 이어져오던 전통적인 의례이자 축전(祝典)인 연등회가 불교계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2년 4월 6일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계조차도 연등회의 실체에 대해 다가가려는 노력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정을 위해 여러 차례의 학술세미나를 거치면서 연등회에 대한 사실(史實)들이 하나씩 밝혀져 갔기 때문이다.
연등회는 불탄일, 즉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초파일 행사였다. 최근 축전화가 강화되면서 일반인들의 참가 확대를 위해 연등행렬이 초파일 전주 주말에 이루어지는 곳이 많다. 이러다보니 연등행렬과 전통문화마당이 펼쳐지는 것만을 연등회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연등회는 연등행렬과 전통문화마당 뿐만 아니라 초파일까지 이어지는 것을 총칭한다. 또한 연등회는 서울의 연등회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올해(2018)도 서울을 비롯하여, 제주, 부산, 광주, 청주 등 전국 주요지역에서 불교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봉축위원회가 구성되어 진행하였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연등회를 바라보고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제주 연등회의 역사를 고찰해보고 현대 연등회의 몇 가지 방안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2. 제주 연등회의 역사
1) 제주 불교와 연등회
고려시대 제주목에는 수정사, 묘련사, 보문사, 서천암 등이 존재했고, 대정현에는 법화사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 성종 12년(1481)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하여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제주에는 15개의 사찰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목에는 존자암, 월계사, 수정사, 묘련사, 문수암, 해륜사, 만수사, 강림사, 보문사, 서천암, 소림사, 관음사 등이 있고, 정의현에는 영천사, 성불암이, 대정현에는 법화사가 있었다. 
오랜 불교사와 여러 사찰들, 특히 고려 황실 원찰과 원 황실의 원찰로 추정되는 법화사와 불탑사 등의 규모있는 사찰이 있었음에도 사찰에서 설행된 의례, 특히 연등회에 대한 단서는 아직까지 찾아 볼 수 없다. 그런 까닭으로 여러 문헌에 언급된 단편들을 바탕으로 재구성을 해 볼 수밖에 없다.
왕실과 서울을 중심으로 한 연등회는 크게 국가주도기와 민관이행기, 민간주도기로 나눌 수 있다. 국가주도기(國家主導期)는 국가와 왕실이 중심이 되어 국가적 행사로 설행한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 초 연등회가 폐지되는 세종 13년(1431)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 연등회는 상원 연등, 2월 연등, 4월 초파일 연등 등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통들이 모두 설행되고 민속화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민관이행기(民官移行期)는 관 중심으로 설행되던 연등회는 점차 쇠퇴하고 민간으로 중심축이 이동하는 시기를 말한다. 성리학적인 지배질서로 인해 불교적인 행사는 불교색이 줄어들었으며, 양반 관료들에 의해 음사(淫事)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희성이 강한 관등과 민속놀이가 사료에 다양하게 묘사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1기와 2기로 구분할 수 있다. 1기는 조선 세종 13년 이후부터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이 체결되는 1910년까지이며, 2기는 일제강점기(1911~1945)이다. 민간주도기(民間主導期)는 해방(1945년 8월) 이후 1946년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로 현재진행형이다. 이 시기는 조선시대의 벽불(闢佛)정책에 따른 위축과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굴절되었던 연등회를 불교계(민간)가 주도했다.


지방의 연등회도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큰 흐름에서는 이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제주의 경우는 국가주도의 영향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연등회가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시대의 벽불 정책으로 주요 사찰에 정책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기 이후 성리학으로 무장한 일부 목사들에 의한 불무(佛巫)의 구체적인 탄압으로 인해, 이 둘은 상호 습합하거나 무속에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지속되는 과정을 거쳤다. 근대기는 항일기로 인해 일제의 영향을 받은 시기이고, 1945년 해방 이후 현대기는 불교계가 자체적으로 연등회를 꾸려나가는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조선시대 이전의 연등회와 본격적인 벽불기(闢佛期) 이후, 그리고 근대기와 현대기로 구분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조선시대 이전의 연등회
조선시대 이전의 연등회는 탐라국 시기와 고려로 편입한 이래 내륙으로 편입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탐라에서 행해진 고려시대 이전의 연등회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주는 탐라국으로 백제 문주왕 2년(476)에 조공을 바쳤으며, 신라와는 백제 멸망 후인 문무왕 2년(662) 2월부터 시작되어 8세기 이후에는 신라와 조공관계를 통해 교류하였다. 『삼국사기』에 이보다 200여 년 후인 신라 경문왕 6년(866)과 진성왕 4년(890)에 황룡사에 가서 등을 보았다고 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탐라에서도 일찍이 연등회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가 전국적으로 설행되었다는 사실은「고려사」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민속에 왕궁과 수도로부터 향, 읍에 이르기까지 정월 보름에는 이틀밤에 걸쳐 연등하여 왔다. 그러나 성종(成宗)이 이것은 분잡하고 상도가 아니라 하여 폐지하였던 것을 이때에 와서 다시 열게 하였던 것이다.「고려사」권69, 禮 11
고려시대는 태조의 훈요십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는 탄생에서부터 이전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연등회가 설행되었다. 위의 기록은 우리나라 민속에 정월대보름에는 수도로부터 향ㆍ읍에 이르기까지 이틀 밤에 걸쳐 전국적으로 연등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고려시대 탐라국은 태조 21년(938)에 작위를 하사받는 등의 교류를 시작으로 숙종 10년(1105)에 탐라군으로 편입되었다. 탐라군으로 편입되기 전에도 고려와 의례적인 관계를 맺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사」세가의 정종 즉위년과 가례잡의 중 중동 팔관회 의식의 대회일에 국왕이 임석하는 의례를 보면 탐라인이 참석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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