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법문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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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법문 (49)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6.07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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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④ : 팔정도 가르침의 핵심

팔정도의 중요한 점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거듭 강조하거니와 팔정도가 중도이다.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는 중도라고 하면 일이(一異)·거래(去來)·유무(有無)·단상(斷常)의 양 극단을 여윈 것으로 정의되는 팔불중도(八不中道)나 공가중(空暇中)으로 정리되는 『중론』의 삼제게(三諸偈)를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경에서의 중도는 명명백백하게 팔정도이다.

<둘째> 팔정도, 즉 중도는 철학이 아니라 실천체계이다. 우리는 『중론』에서 말하는 중(中)의 의미를 철학적 사유에 기초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러한 설명은 오히려 실천체계로서의 중도를 관념적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크다. 중도는 부처님께서 팔정도의 정형구로서 정의하신 내용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중도의 도에 해당하는 빠알리어 빠띠빠다(patipadā)가 실제로 길 위(pati)를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ā)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셋째> 팔정도의 수행은 총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수행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 하지 않고 테크닉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간화선만이, 염불만이, 기도만이, 위빠사나만이 진짜 수행이라고 주장하면서 극단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기법이나 특정한 한 가지만을 도라고 하지 않고 여덟 가지, 즉 팔정도로 말씀하셨다. 이러한 여덟 가지가 총체적으로 조화롭게 계발되어 나갈 때 그것이 바른 도, 즉 중도이다.

<넷째> 팔정도는 지금·여기(now here)에 있다. 수행은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하고 절하는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사찰이나 선방이나 명상센터라는 특정한 장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임제(臨濟) 스님도 ‘바로 지금 여기일 뿐 다른 호시절은 없다. 直是現今 更無時節’라고 하였다. 팔정도 수행은 매 순간 머무는 곳,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섯 째> 팔정도 수행은 한 방에 해치우는 것이 아니다. 팔정도에 관한 한 초기불전에서 거듭 강조하시는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은 ‘닦고 많이 공부 짓는 것’이다. 이것은 「도 상윳따」(S45)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 중도는 팔정도를 거듭해서 닦는 것이다. 범부는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서 중도인 팔정도를 실천하고, 깨달은 분들은 팔정도로써 깨달음을 이 땅 위에 구현한다.

주석서(DA.ii.301)에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를 ‘예비 단계의 도’라고 설명하고, 전자와 후자에 다 적용되는 것을 ‘혼합된 도’라고 부른다. 예비 단계의 도란 출세간도를 얻기 위해서 닦는 그 이전 단계의 도를 뜻하고, 혼합된 도란 예비 단계의 도와 완성된 출세간도가 섞여 있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 직계 제자 때부터 부처님의 명령이라고 불렸다. 실천으로서의 부처님 명령은 극단을 여윈 중도요, 그것은 팔정도이다.  ‘팔정도를 닦아서 지금 여기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라’라고 하신 부처님의 지엄하신 명령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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