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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2월 연등회 보편화…제주 영등굿과 연관성

제주불교연합회(회장 관효 스님)가 주최하고 사)탐라성보문화원(원장 오홍식)이 주관한 전통문화 연등회(연등축제) 보존방안 세미나가 지난 5월 26일 적십자 제주도지회 강당에서 열린 가운데 발제를 맡은 고상현 박사의 발표내용을 요약정리해서 싣는다. <편집자주>

 

영등굿과의 연원과 시기, 내용에 등장 불교적 요소, 
지장본풀이 지장보살, 미륵보살 등 연관성 적지 않다

 

 

① 경자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신봉루(神鳳樓)에 거둥하여 백관에게 술과 음식[酺]을 하사하였으며, 저녁에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다음날 대회(大會)에서 또 술과 음식을 하사하고 음악 공연을 관람하였으며, 동경(東京)과 서경(西京), 동로(東路)와 북로(北路)의 병마사(兵馬使), 4도호(四都護), 8목(牧)이 각각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하였다. 송(宋)의 상인, 동번(東蕃), 서번(西蕃), 탐라국(耽羅國)이 또한 토산물을 바쳤으므로, 의례를 관람할 수 있는 자리를 하사하였는데 후에는 이것이 상례가 되었다.

② 동·서 번자(蕃子)를 인도하며 이어 좌집례관이 탐라인(耽羅人)을 차례로 인도해 조하 및 전선(傳宣)하는 의례는 모두 송 강수(綱首)에게 행하는 의례와 같다.” 

①은 세가편의 정종 즉위년(1034) 11월 14일(음)에 열린 팔관회이고 ②는 임금이 축하할 의식을 말하는 가례잡의 중 팔관회 의식의 한 장면이다. 팔관회는 주변 국가들에서 참석하는 국제적 행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 팔관회는 제천의식, 연등회는 불교이라는 차이를 제외하고는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소회일과 대회일로 구성되었으며, 등불을 밝히고 채붕을 설치하고 백희잡기를 베풀었다. 팔관회에 설치한 윤등(輪燈)과 사방에 나열한 향등(香燈)을 비롯하여 각종 백희잡기를 보았음을 의미한다.
고려시대 사찰로는 대표적으로 대정현에 있었던 법화사를 들 수 있다. 장보고는 810년을 전후하여 중국의 적산 법화원을 창건하고 이어서 810~828년에 완도와 탐라에 법화사를 창건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지역 사원들은 해당 지역의 읍사와 긴밀히 유대 협조 및 상호 의존하고 있었으며, 지역민에 대한 교화와 윤리도덕, 국태민안 등을 설법하였다. 고려시대 제주목에는 수정사, 묘련사, 보문사, 서천암 등이, 대정현에는 법화사 등이 있었는데, 특히 법화사와 수정사는 비보사찰로서 이와 유사한 역할과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연등회도 설행되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국가주도기의 탐라 연등회에서 주목할 부분은 상원 연등회보다는 2월 연등회이다. 상원 연등회는 성종대(981∼997)에는 유교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하여 유교의례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에 따라 분잡하고 상도가 아니라 하여 일시 폐지되었다. ‘고려사’에는 성종 원년(982)에 팔관회의 잡기만을 없앴다가 성종 6년(987)에는 완전히 폐지했다고 하므로 연등회도 이와 같이 하지 않았을까 한다. 성종의 연등회와 팔관회의 동시 폐지는 호족들의 지역적 지배력의 권위를 해체하고 왕 중심의 농경제의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연등회의 폐지는 관리층과 일반백성들에게도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20여 년만인 현종(顯宗) 1년(1010)에 상원 연등을 폐지하고 2월 연등으로 부활하였다. 

봄 윤 2월에 연등회(燃燈會)를 부활시켰다. 나라의 민속에, 왕궁과 국도에서 시골까지 1월 15일부터 이틀 밤 연등회를 베풀었는데, 성종 때부터 폐지하고 베풀지 않았으므로 이때에 이를 부활시켰다.

현종(顯宗) 원년 윤 2월에 연등회(燃燈會)를 다시 열었다. 그 이듬해 거란과의 전쟁 중에도 청주행궁에서 2월 연등회를 개최하는 등 이후 고려사회에서는 상례화되었다. 그 후부터는 2월 보름에 연등하는 것이 전례로 되었다. 
탐라국이 고려로 편입된 숙종 10년(1105)은 이미 국가주도의 상원 연등회가 폐지되어 1세기가 흘러간 시점으로 상원 연등회가 설행되기는 하였지만, 2월 연등회가 보편화되어 가고 있었던 시기이다. 2월 연등회가 중요한 것은 현재도 제주에서는 연등굿놀이나 영등굿(燃燈-)이 설행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2월을 영등달이라 하고, 영등신이 이달 초하루에 들어와 보름에 떠난다고 한다. 그래서 초하루에는 영등 환영제를 하고 보름에는 영등 송별제를 곳곳에서 지낸다. 영등굿은 신들을 불러들이는 초감제, 본향당신을 불러들여 축원하는 본향듦, 용왕신과 영등신을 제장으로 맞아들여 기원하는 요왕맞이, 바다에 씨를 뿌리는 씨드림, 마을 전체의 액을 막는 도액막음, 영등신을 본국으로 보내는 영감놀이, 모든 신들을 돌려보내는 도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등굿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 연원과 시기, 내용에 등장하는 불교적 요소, 예를 들면 연유닦음에서 등장하는 석가모니 부처님, 지장본풀이의 지장보살, 미륵보살 등을 감안해볼 때 그 연관성은 적지 않다.
고려의 연등회는 정월 보름, 이월 보름, 4월 초파일 이렇게 정해진 세시민속으로 설행되었다. 또한 특별한 경우에 개최되는 특설연등회도 있었다. 이들은 같은 해에 동시에 설행되기도 하였다. 탐라가 고려에 편입되기 전에도 초파일 행사가 설행되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신라나 고려와의 관계 이후, 특히 고려시대 주요 사찰의 건립으로 불교의 확산과 더불어 연등회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지 않았을까 한다. 

3) 조선시대의 연등회 
조선시대는 일반적으로 태종 5년(1405)에 본격적으로 사원이 정비되어 그 다음 해에 기존의 12종파를 2~3종파를 묶어서 모두 7개로 통합하고 각 소속사원 수를 242사가 되게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숫자는 전국의 사원의 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사사전(寺社田)을 비롯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원으로 선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정책은 제주에도 영향을 미쳐 태종 8년(1408) 2월 정미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주(濟州)의 법화(法華)·수정(修正) 두 절의 노비의 수를 아뢰어 정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제주 목사(濟州牧使)의 정문(呈文)에 의거하면 주경(州境)에 비보사찰(裨補寺刹)이 두 곳인데, 수정사(修正寺)에는 현재 노비 1백 30구가 있고, 법화사(法華寺)에는 현재 노비 280구가 있습니다. 비옵건대, 두 절의 노비를 다른 사사(寺社)의 예(例)에 의하여 각각 30구를 주고, 그 나머지 3백 82구는 전농(典農)에 붙이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15개의 사찰 중 비보사찰인 법화사와 수정사의 노비수를 줄이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사찰과 승려들의 활동을 위축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연등회와 관련해서는, 세종 5년(1423)에 대궐안의 연등을 없애도록 한 이후, 5년 뒤에는 오히려 연등을 금지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사간원에서 계하기를, “연등(燃燈)은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처에게 공양(供養)하고 중에게 재공(齋供)하는 것도 또한 다 금하지 못하는데, 어찌 유독 연등만 금할 수 있겠는가. 뒷날에 승려에게 제공하는 것을 금지한 뒤에 이를 금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세종 10년(1428) 3월 23일 사간원에서 연등을 금하자고 하니 세종은 승려에게 제공하는 것을 금지한 뒤에 이를 금하자고 하여 연등을 금하자는 사간원의 장계를 듣지 않는다. 이때 사간원에서 올린 장계는 전국적으로 설행되고 있던 연등회를 폐지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즉 궁궐에서의 연등은 폐지된 것으로 보이며, 민간에서의 연등회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간언으로 인해 세종 13년(1431)에 결국 절 이외에서의 연등을 일체 금지하도록 윤허하게 된다.

사헌부에 하교(下敎)하기를, 
“본조(本朝)의 민속에 4월 초8일을 부처의 탄생일이라고 하여 연등(燃燈)과 관등놀이[觀戲]를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요즈음 간원(諫院)에서 폐를 말하고 파(罷)하기를 청하였다. 네 생각에 오래 된 습속을 갑자기 쉽사리 고칠 수 없으나 오직 이 습관만은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절[僧舍] 이외에서의 중외(中外) 연등(燃燈)은 일체 금하라.”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날짜가 이미 임박하였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혹 알지 못하여 금령(禁令)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오는 초8일에는 우선 서울 안에서만 금하고, 알지 못하여 범하는 자는 죄주지 말며, 외방(外方)은 내년부터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지방에서 공동으로 행하던 연등회는 설행되지 못하고, 사찰 내의 연등회로 축소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15세기 중반부터 실질적인 행사는 폐지되어, 16세기 양반 사대부들의 시(詩)에는 상원 연등회의 관등이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는 기록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15세기에도 사대부들의 한도십영이라는 시구 가운데 종가관등(鐘街觀燈)에 대한 시에서 보이듯이 관등놀이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춰보았을 때 수도 한양에서도 정책적인 지침과는 달리 오래된 민속으로서 연등회는 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지역의 연등회는 관찰사나 목사 등 개인의 성향에 따라 정책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서는 조선시대에도 음력 2월 연등회가 설행되었다. 조선시대의 기록들은 최부의 「탐라시 삼십오절」,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상헌의 ‘남사록’, 이원진의 ‘탐라지’, 이증의 ‘남사일록’, 이형상의 ‘남환박물’,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들 기록들은 15세기 후반, 16세기 중반, 17세기 초반・중반・후반, 18세기 초반 그리고 19세기 중반의 기록들이다. 
<다음호에 계속>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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