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초파일 거리마다 등 달고 집집마다 오색불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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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초파일 거리마다 등 달고 집집마다 오색불 밝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6.1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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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연등회의 역사와 나아갈 방향(3)

제주불교연합회(회장 관효 스님)가 주최하고 사)탐라성보문화원(원장 오홍식)이 주관한 전통문화 연등회(연등축제) 보존방안 세미나가 지난 5월 26일 적십자 제주도지회 강당에서 열린 가운데 발제를 맡은 고상현 박사의 발표내용을 요약정리해서 싣는다. <편집자주>


 

1681년 발간한 이증의 ‘남사일록’에도 연등을 묘사하고 있다.

연등절에 이르니 장대를 세워 둘러싸고  燃燈節屆立竿牢
나희 때 꿩꼬리 장식 깃발 높이 빙빙 돌리네.    儺戱時廻奉纛高
장수하는 고장 8월에는 좋은 일도 많아   壽城淸秋多好事
그네뛰기 줄다리기 닭싸움 하네.     
鞦韆照里捕鷄毛

‘남사일록’은 이증이 제주안핵겸순무어사로 파견되어 머무른 1679년 10월 27일부터 168년 4월 4일까지 5개월여를 머무르면서 쓴 일기이다. 본인이 경험하지 못한 음력 8월의 민속도 묘사하고 있어 자신의 경험담보다는 전해들은 이야기를 시로 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연등절에 장대를 세워 둘러쌌다고 한 것으로 보아 현대 연등회에서 볼 수 있는 장대와 사방으로

1980년 본문사 부처님오신날 기념사진, 장대를 세운 유사한 모습이 보인다.

드리운 깃발과도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이어져 오던 연등회의 전통은 이형상(1653~1733) 목사 등으로 인해 바뀌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형상은 1701년(숙종 27) 겨울에 부임하여 1703년(숙종 29) 6월까지 임기 2년반을 채우지 못하고 제주목사직을 떠나게 된다. 그럼에도 그가 제주에 미친 영향은 실로 제주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그 자가 불태워버린 신당이 129곳인 점은 차이가 없다. 하지만 없앤 사찰은 <건포배은>에는 5개, <병와선생이공행장>에는 해륜사와 만수사 2곳으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신당과 사찰은 음사(淫祀)라 하고 그 폐단을 없앤 사실은 변함이 없다. 
구한말 제주 선비 김형식(1886~1927)은 ‘혁암산고’ 중 1917년에 쓴 「유관음사기(遊觀音寺記)」에서 “어떤 이는 이형상이 제주목사가 되어 모두 없앴다고 하나 읍지를 살펴보면 자세하지 않다.”고 하고 있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불교와 무속이 타격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제주는 유배의 섬으로 1725년(영조 1)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1729년 호남에서 무고를 쓰고 풀려났다 다시 제주로 유배 온 환성지안(1664~1729)이 있었다. 비록 일주일 만에 병을 얻어 입적했으나 당시의 유명세를 보았을 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유배하던 시절, 초의의순(1786~1866)은 1843년에 6개월간 제주에서 머무르게 된다. 이 때 산방굴사에서 주석하였다. ‘원대정읍지’에 “초의 스님은 산방굴사에서 수도하였고, 추사에게 ‘밀다경(密多經)’ 쓰기를 권하여 세상에 전하였다”고 하고 있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조의 부탁을 받고 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조선말기인 1898년(대한광무 2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으로 제주도로 유배 온 김윤식(1835~1922)이 쓴 ‘속음청사’ 에는 양력 5월 17일, 음력 사월 초파일을 기념하여 등을 달았다고 하고 있다.
(1899년 5월) 17일 (초8일 乙酉)
맑음. 삼은, 아석, 양천, 규원, 국사, 하산, 이호와 같이 삼천재, 공신정에 올라가 쌀밥에 미역국을 들며 석가탄생의 좋은 날을 구경하고 시 한 수를 지었다.
조운성이 종이등[紙燈] 세 개를 만들어 집의 마당 가운데 걸어놓았다. 돌아와서 여러 사람을 맞아, 그 밑에서 함께 마셨다.
(1900년 5월) 6일(초9일 庚辰)
… 조운성이 종이등 십여 개를 손으로 만들었는데, 어제는 비바람 때문에 매달지를 못했다가 오늘밤에야 처마 낙수받이 밑에 걸었다. 줄줄이 매인 게 꿰어놓은 구슬 같고 빛이 온 마당을 비추었다. 
‘속음청사’는 김윤식이 1887년 5월 29일부터 1921년 12월 31일까지 35년간 쓴 일기이다. 이 가운데 제10권인 1898년 1월 11일 유배지인 제주도에 도착하여 1901년 7월 16일 전남 무안군 지도로 이배되기까지 3년 7개월여를 머물면서 쓴 글이다. 조선시대의 제주 연등회에 대한 기록 가운데 4월 초파일을 단편이나마 언급한 보기 드문 사료이다. 조운성이란 이가 직접 종이로 등을 만들어 처마나 마당 가운데 걸어놓았다는 것으로, 등 제작의 일단과 등의 거치 방법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어, 당시 각 가정에서 등을 만들거나 걸어놓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2월 연등에 대해서는 영등제라 하여 “매년 2월 초부터 보름 전까지는 반드시 매일 큰 바람이 분다. 속전에는 연등신(燃燈神)이 있어서, 집집마다 푸닥거리를 준비하고 무당을 시켜 축원을 빈다.”고 하여 무속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 유림들은 ‘전등록’을 읽기도 하고 나한상을 봉안했다고도 하는 등 불유(佛儒)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유학자들의 불교 신행이 이루어지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이형상 이후 두 스님과 김윤식의 행적과 기록을 통해 볼 때, 연등회도 지속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근대(1900~1945)의 연등회
근대기에 접어들어서는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여러 신문을 비롯하여 개인의 문집, 사진 자료 등이 그것이다. 사진과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근대 연등회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1924년 6월 한라산 백록담 관불회


이 시기는 강창규(1878~1963)가 16세인 1892년 4월 8일 출가한 것을 필두로 1909년 제주의병항쟁을 비롯하여 무오 법정사 항일투쟁의 본거지였던 법정사의 사상적 토대를 닦은 김석윤 스님(1877~1949), 근대제주불교의 안살림을 맡아 각 사찰의 창건과 재건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안봉려관 스님(1865~1938), 초대 관음사 주지를 지낸 도월정조 스님(1879~1936)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주불교가 활발하게 재건되어 외형적인 모습을 갖추어 갔다. 
1918년 3월 2일 <매일신보>의 “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이라는 기사에 “제쥬인민의 피속에ㄴ ㄴ 부쳐를 밋ㄴ  ㄴ 졍셩이 부지 즁에 흘너 나려와 비교젹 다른 디방보다ㄴ  ㄴ  부쳐와 인연만은 곳이라.” 하였다. 1924년 4월 초파일에 관음사 중창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1924년 5월 16일 <매일신보> 4면에 보도된 것을 보면 당시 초파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는 제주불교협회가 창립된 직후이기도 하였다. 
6월에는 한라산 백록담에서 관불회(灌佛會)를 거행하였다. 이 때 이회광, 대흥사 주지를 비롯하여 제주도 승려 30여 명과 수백 명의 신도가 참가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을 보면 스님들 뒤로 가마[輦]가 보이는데 이는 관불을 위한 탄생불을 이운한 연이 아닌가 한다. 가운데 솟은 장대 두 개는 연등을 나열하고 그 아래로 번을 드리운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형태의 연등은 1980년 본문사의 초파일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1925년 6월 10일 <매일신보>의 “제주 특별 봉불식” 기사에 “전남 백양사지부 제주 원당사에서는 주임 하시율씨가 성의로 포교에 열심히던 바 去 五月 三十日은 즉 閏 四월 八일 초파일이라. 석가모니불의 탄신을 존중하는 정신으로써 難得의 好기회라 하야 기념적으로 당일에 성대히 봉불식을 거행하얏는대 신도는 무려 四百人 以上이 참석하얏고 주임 하시율씨 개회식사가 有한후 오이화씨의 취지설명과 홍승균씨의 역사보고와 이회명 선사의 설법과 來賓의 축사가 차제 진행되야 일대의 성황을 정하얏다더라.”
1926년 1월 6일 김여옥 등 25명의 발기로 제주불교협회 산하 단체로 ‘제주불교부인회’가 조직되었고, 2월에는 김일순 외 11명의 발기로 ‘제주불교소녀단’이 조직되었다. 사진 3은 1926년 4월 초파일을 맞이하여 제주불교연합회가 관음사 포교소에서 봉행한 법회 이후 제주불교부인회와 불교소년단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1927년 5월 14일 <매일신보>의 “제주 불탄 축하식” 기사에 “제주불교협회에서는 四월 八일 석존탄강축하식을 거행하고자 七일 오후에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회계 축하식 거행의 要項을 토의하고 翌八일에 신중히 불탄축하식을 거행 하얏다는데 굉장한 緣門의 건설과 찬란한 紅燈輝煌은 空前의 盛況을 呈하얏스며 정오에 법사 이회명씨의 鬪河한 설법과 助敎師 오이화씨의 석존 역사와 강태현 양홍기씨의 강연이 有한 후 부인회의 獻茶와 소녀단의 한 唱歌의 餘興으로 무사히 폐회 되얏더라.”고 하였다. 초파일 모습을 보다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기사는 1927년 6월 ‘불교’를 통해서이다.
1927년 초파일에는 하늘 높이 등을 달고 거리에는 집집마다 오색불을 밝혔다. 설법과 찬불가를 비롯하여 희만, 무도, 유희, 소인극을 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고려와 조선부터 전해져오던 연등회에서 법요식과 다양한 연희가 있었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일제시기 제주불교협회장도 일인이었던 시절에 설행한 것이라 전통적인 것인지 일식이었는지, 복합적이었는지는 더 확인이 필요하다.
1920년대 중반 제주는 기존과는 달리 많은 불자들이 새롭게 조성된 사찰을 중심으로 모여 들었으며, 초파일 행사도 성황리에 설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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