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법문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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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법문 (5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6.2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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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비교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몇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마타 또는 위빳사나 모두 중요한 것은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세간적인 경지에서 보면 사마타의 대상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paňňati)이고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dhamma)이다. 이것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이다.
  <둘째> 사마타는 표상이라는 대상에 집중하여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이고 위빳사나는 법이라는 대상을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로 통찰하는 통찰지를 계발하는 수행이다. 사마타는 마음이 표상에 집중되어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그치고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지(止)로 옮겼다. 위빳사나는 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ā)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법의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특성을 여실지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관(觀)으로 옮겼다.
  <셋째> 사마타의 키워드는 표상이고, 위빳사나의 키워드는 무상·고·무아이다. 『청정도론』은 삼매의 대상을 40가지 명상주제로 정리하고 있다. 사마타 수행을 본삼매를 닦는 수행이라고 좁혀서 정의한다면 사마타는 이들에 속하는 22가지 명상주제 가운데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욱가하 니밋따)을 만들고, 이것이 마침내 닮은 표상(빠띠바가 니밋따)으로 승화되어 흩어지지 않고 오롯하게 되어 매 순간의 마음들이 이 닮은 표상에 고도로 집중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위빳사나는 마음, 마음부수, 물질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는 통찰하는 수행이다.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하게 된다.
  <넷째> 삼매의 입장에서 보면 사마타로 성취되는 삼매는 ‘근접삼매’나 ‘본삼매’이고,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의 고도의 집중은 ‘찰나삼매’이다. 
  <다섯째> 사마타의 고요함만으로는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는 마음과 대상이 온전한 하나가 된 상태로, 밝고 맑은 고요함에 억눌려 탐(貪)·진(嗔)·치(痴)가 드러나지 않고 잠복되어 있을 뿐이고, 사마타에서 나오면[出定]하면 다시 탐·진·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를 초기경에서는 일시적인 해탈(samaya-vlmutta)이라고 한다(A5:149). 그러므로 무상·고· 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의 힘으로 탐·진·치의 뿌리를 완전히 멸절시켜야 그러한 번뇌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이처럼 위빳사나의 지혜가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마타의 도움 없이 위빳사나의 지혜가 생기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사마타와 위빳사사라는 술어는 거의 대부분 함께 나타나며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여섯째> 사마타와 위빳사나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닦아야 하는지, 또는 둘 다를 동시에 닦아야 하는지의 문제는 결국 인연 닿는 스승의 지도방법이나 수행자 자신의 관심과 성향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선(禪)의 습기 없이 마른 위빳사나만 닦아서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주석서에서 말한다.  
  결론적으로 부처님께서는 사마타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위빳사나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둘 다를 동시에 닦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타를 먼저 닦아야 한다거나 위빳사나만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고, 이런 견해를 고집하면 진정한 수행자라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불교 수행은 어떤 경우에도 무상·고· 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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