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끼는 마음에 모든 탓 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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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끼는 마음에 모든 탓 둬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6.2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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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뽀 졸덴 스님의 로종 수행 <2>

로종 수행은 보리심 수행을 말한다.‘로’는‘마음’을‘종’은‘훈련하다, 교육하다’의 뜻으로‘마음을 길들인다’는 뜻이 담겨있다.‘로종’은 티베트 불교에서 그 방법을 만든 것으로, 아띠샤 존자는 이것을 7종59가지로 정리하셨다. 이번 로종 수행은 지난 4월 켄뽀 졸덴 스님을 모시고 3박4일 백담사에서 정진한 일심각 포교사(포교사 21기)가 정리한 내용을 실었다. <편집자주>

 

 

분석을 통해 지심(지견)에 이르면 지심 속에서 그대로 쉬는 것이다. 여기서는 무엇을 하거나 조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도의 본체인 알라야식에 쉬어라’의 알라야식은 의식적인 마음이 아닌 이원론적 중립상태를 의미한다. ‘모든 것의 근간’으로 몸과 말과 마음의 모든 행위들의 정신적 흔적의 저장소로 사용된다. 궁극적 지견을 갖는 것은 분석을 통하여 가지면 마음이 대상(집착)없이 마음 그대로를 본다. 조작 없이 마음이 쉬는 것이다. 조작 없이 쉬는 것은 같으나 분석하여 조작 없이 쉬는 것과 처음부터 조작 없이 쉬는 방법이 있다. 
대치법은 나(아집)를 집착하는 것을 대치하는 것이다. 대치법은 공성-모든 현상의 실상과 나의 실상을 의미-을 의미한다. 모든 것의 실상인 공성인데 그것조차 개념이므로 그 개념조차도 공성으로 사라지게 된다. ‘공성’이라는 생각조차도 공성의 경험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공성은 어떻게 명상하나 알라야(꾼시, 순수자각)에 마음을 쉬는 것이다. 공성은 도(道)의 본성을 의미한다. 모든 불교전통에서는 마음을 6식으로 구분한다. 여기에 번뇌의 마음인 말라식과 모든 것의 기반인 알아랴식이 더해져 8식이 되는 것이다. 
알라야는 모든 개념적인 것을 벗어난 것이다. ‘공하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수행자는 알라야식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여기서 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 보리심을 삼매경으로 명상하는 것이다. 
‘모든 현상을 환영으로 여겨라’는 일상생활에서 보는 것이나 만나는 것도 환영처럼 접하는 것이다. 좌복에 앉아 명상의 지견의 결과를 더욱 명료하게 한다. 
상대적 보리심은 우선 기초수행(자애심과 자비수행)이 기반이 되어야 가능하다. 현재 사랑이 많고 자비로운 사람은 과거생에 이런 수행을 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자애심, 자비심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가까운 대상에게 먼저 해야 한다. 
로종 수행은 모든 중생이 전생에 우리를 키운 어머니이다. 우리를 사랑하셨고, 희생하셨고, 아낌없이 베푸셨다. 그분들의 은혜가 하늘같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자애심은 행복을 바라는 마음,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바라는 마음, 삼세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대승불교는 수행에서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를 바라는 것이 자애심의 기준이다. 자애심을 기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보리심을 가지려면 사랑과 자비심을 자져야 하듯이 먼저 자애심이 있어야 한다. 우선 윤회의 무상을 생각하면 출리심(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래야 자애심이 생기고 자애심이 있어야 자비심이 생기고 보리심을 가질 수 있다. 사랑과 자비심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그것이 정말 자비심인지 잘 살펴야 한다. 정말 자비심이 있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숨긴다. 기대하는 것이 없고 조건 없는 자비심이 진정한 자비심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과 자비심은 마치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자비심이 아니다. 상대적 진리를 모르면 궁극적 진리를 알 수 없다. 상대적 보리심을 기르지 못하면 궁극적 보리심을 기를 수 없다. 
# 주고받기(똥렌)를 교대로 하라. 이것을 호흡에 맞추라. 
똥렌은 남과 나를 바꾸는 것(교환)이다. 아띠샤 존자의 경전에는 나와 남이 같다는 조건을 전제로 교환한다. 주고받기의 수행은 우리의 삼세공덕을 중생들이 성불하기 위해서 중생들에게 준다. 받는 것은 중생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받는다. 주고받기를 교대로 하며 호흡을 맞추라. 들이마실 때에 고통과 고통의 원인(오만, 집착, 번뇌, 분노, 슬픔 등)을 까만 연기로 들이마시며, 내쉴 때는 모든 공덕과 삼세의 공덕은 하얀 빛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흡수되어 성불의 조건을 갖게 된다. 이렇게 반복하는 것이 똥렌수행이다. 상대적 보리심의 실제적 수행이 똥렌 수행이다. 
# 세 가지 대상, 세 가지 독, 세 가지 선근
이것은 좋아하는 대상, 싫어하는 대상, 중립적인 대상을 말한다. 좋아하는 집착과 싫어하는 분노 혐오와 중립적인 것은 무지를 일으킨다. ‘세 가지 독(탐진치)’는 세 가지 대상으로 인하여 일어난다. 이것을 알아차려서 세 가지의 선근으로 탈바꿈하도록 한다. 화가 날 때도 나처럼 분노 때문에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의 분노를 받겠다는 마음으로 분노를 탈바꿈할 수 있다. 
어떻게 할 수 있나? 집착이 생기면 고통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을 알고,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구나! 모든 중생의 고통이 나에게 오기를’ 번뇌(집착)를 선근으로 탈바꿈하는 수행이다. 번뇌를 방편으로 삼으므로, 번뇌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근’으로 삼는다. 대승불교에서 번뇌를 수행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이 있다. 
# 모든 상황에서 경구로 수행하라. 
구절을 기억하거나 말하고 어떤 상황이라도 그 상황에 맞는 경의 구절을 떠올려 모든 사람을 접한다. 우리의 말은 상상을 하게하고 상상은 감정을 일으켜 준다. 그러므로 구절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용수보살의 유명한 구절 “모든 어머니 고통이 나에게 오기를, 내가 받기를, 나의 공덕은 모든 어머니에게 가기를……” 이것을 그냥 독송하는 자체가 큰 복이 있다. 
# 받는 것을 먼저하고, 주기를 한다. 
예를 들어 병들어 고통 받고 좌절할 때 미래 생에 삼악도에 떨어질 것을 미리 당겨서 받는다고 생각하여, 이로써 ‘미래의 고통을 피하게 되는 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띠샤 존자는 상대적 보리심이 위없이 훌륭하다고 했다. 더 이상 좋은 수행은 없다. 
세 번째 역경을 거울 삼아라. 안 좋은 상황을 도(道)로 삼는 것이다. 
# 모든 세상이 악행으로 가득할 때, 모든 역경을 깨달음의 길로 바꾸라. 
전생의 업으로 인하여 좋지 않은 상황에서 살고 주변사람들도 우리를 안 좋게 생각하고 공격한다. 이것이 우리 과거생(전생)의 업의 결과이다. 좋지 않은 상황과 동반자들은 업을 수행하는데 좋지 않은 동반자들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좌절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해탈의 길’로 삼고,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상황과 동반자를 상대로 하여 궁극적 보리심과 상대적 보리심을 수행하는 것이다. 또 하나 특별한 방편이 다음 것이다. 
# 모든 탓은 하나에 두라
여러 사람이나 여러 대상을 탓하지 말고, 딱 하나(아집, 나를 집착하는 마음)만 탓하라. 몸이 아프거나 역경을 겪을 때 여러 환경이나 조건을 탓하지 않고, 나만 중요시하는 ‘아집’을 탓하는 것이다. 여러 경전에 보면 모든 고통의 원인은 나를 집착하고 나만 아끼는 이기적인 에고가 중심인 마음이다. 용수보살의 입증론에 ‘지나가고 말(무상한) 오온을 집착해서 허물과 고통이 비롯된다’고 한다. 모든 번뇌와 허물의 원인은 오온에 집착해서 생긴다. 보살은 이것을 보고 수행한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중심이 되어서 여기에 가두는 것이다. 우리가 집착하는 이유는 오온을 잘못 해석해서 착각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으나 우리가 영원하고, 영원불변하고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상대적 자아(원인과 조건으로 일어나는 개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독립적 자아와 영구적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모든 잘못과 해가 나를 집착하는데서 온다면 마장이 무슨 소용있나?’, ‘나’라는 존재를 집착하면, 모든 다른 사람은 ‘남’이 되므로, 집착과 증오가 생겨서 여기서 잘못이 일어난다. 나를 집착하면 남을 무시하게 되고, 남을 싫어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나만 아끼는 마음에 모든 탓을 두어야 한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 남을 원망해도 사실은 나를 집착해서 그런 것이다. 부처님은 자아를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해칠 수 없다. 
집착이 있으므로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나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내가 최고다’ 이것이 바로 나만 아끼는 마음이다. 좋은 것을 입고,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통, 잘못, 번뇌는 그 뿌리가 ‘나에 집착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의 원수, 우리가 악마하고 하는 것은 나에 집착하고 아끼는 마음이다. 이제 아집과 새로운 나가 논쟁을 벌인다. “너 때문에, 네가 나의 삶을 다스리고 힘들게 했어, 이제 너를 봤으니 더 이상 네 말을 안들을 거야!” 새로운 ‘나’를 찾은 것이다. 
# 모든 사람들의 은혜를 생각하라. 중생들의 은혜를 생각하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중생이 필요한 것이다. 중생은 전생의 나의 어머니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전생의 어머니로 생각하고 대하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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