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65)-전남 화순 영구산(靈龜山) 운주사(雲住寺)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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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65)-전남 화순 영구산(靈龜山) 운주사(雲住寺)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7.0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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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이 오면 벌떡 일어선다는 운주사 와불

화순 운주사를 흔히 ‘천불천탑의 절’이라고 한다. 오늘날 실제로 남아있는 것은 석불 91좌, 석탑 21기니 수에서 천불천탑과는 차이가 많다. 1942년 기록에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니 지금에 비해 2배 정도 많이 남아 있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되고 1530년(중종 25)에 내용이 추가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과 석탑이 각 1,000기씩 있고 한 석실에는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雲住寺在千佛山寺之左右山背石佛塔各一千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는 기록이 있다. 이 글이 저자가 일일이 불상과 탑을 세어보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1942년의 기록보다도 훨씬 많았던 것은 분명하다. 아마 많은 수의 불상과 탑이 조선시대의 억불정책과 임진왜란 및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파괴, 파손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절이 폐사되면 인근 주민들이 절에 있는 석재들을 가져다 주춧돌, 섬돌, 계단이나 무덤의 상석으로 사용했는데 운주사의 불상과 탑도 그렇게 하나둘씩 사라졌을 것이다. 
 운주사는 나지막한 산과 산 사이의 편평한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운주사 곳곳에 널려진 불상과 불탑을 보고 당황한다. 가볍게 나들이 온 젊은 연인이나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은 재미있다고 즐거워하지만 여러 절을 순례했던 불자들에게는 규칙 없이 무질서하게 세워진 것 같은 느낌과 다른 곳에서 보지 못했던 특이한 모습 때문이다. 누군가 불상과 탑을 장난스럽게 만든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1m도 안 되는 작은 크기부터 12m에 이르는 큰 불상의 몸은 모두 납작한 형태이며 얼굴은 코만 조금 도드라졌을 뿐 나머지는 선으로 새긴 것처럼 입체적이지 않고 무표정한 모습이다. 팔다리의 비례도 제대로 맞지 않아 얼굴과 몸매에서 부처님의 위엄을 전혀 찾을 수 없다. 탑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육각, 팔각이나 원형탑이 대부분이다. 불상과 탑을 보다 보면 도대체 하나둘도 아닌 수많은 못생긴 탑과 불상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 의문이 든다. 
 운주사 창건에 대해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운주사에서 멀지 않은 영암 출신인 풍수지리로 유명한 도선국사(827~898)가 창건했다는 것이다. 도선이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배의 중앙에 무게가 실려야 하므로 배의 배(腹)에 해당하는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또 영남 쪽에 산이 많고 호남에는 적으므로 배가 동쪽으로 기울어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술을 써서 하루 만에 천불천탑을 세웠다고도 한다. 전라남도 도청에서 펴낸 『전남의 전설』에는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도선이 여기에 절을 세우기 위해 머슴을 데리고 와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용강리 중장터에 몰아놓고, 단 하루 사이에 천불천탑을 완성하고 새벽닭이 울면 가도록 일렀다. 천상에서 내려온 석공들은 절 위의 공사 바위에서 돌을 깨어 열심히 일했으나, 도선이 보기에 하루 사이에 일을 끝내지 못할 듯싶으므로 이곳에서 9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일괘봉에 해를 잡아놓고 일을 시켰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었지만 천상에서 내려온 석공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의 일손을 거들어주던 도선의 머슴들이 지쳐 꾀를 생각해냈다. 어두운 곳에 숨어서 닭 우는 소리를 흉내 낸 것이다. 꼬끼오, 일을 하던 석공들은 가짜로 우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모두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이 때문에 운주사에는 미처 세우지 못한 와불이 생겼고, 6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화순군 도암면 봉하리의 하수락(下水落, 아릿무지개) 일대의 돌들은 천상의 석공들이 이곳으로 돌을 끌고 오다 버려두고 가서 중지된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이 내용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령 맞다하더라도 하늘에서 내려온 석공들이 만들었다는데 불상이나 탑이 저렇게 제멋대로 자유분방하다니 더욱 믿을 수 없을 것이다. 1984년 전남대학교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운주사는 11세기에 창건되어 12세기에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고 정유재란 때 폐사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탑과 불상도 고려시대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이에 따르면 도선국사는 유물들보다 훨씬 전인 9세기에 살던 인물이니만큼 연대가 맞지 않는다. 인근 출신인 도선이라는 큰스님과 예사롭지 않은 수많은 불상과 탑이 만들어진 신비로움이 합해져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와 함께 널리 퍼져 있는 또 다른 설은 운주사 불상의 파격적인 모습에서 수탈에 지친 농민과 천민들이 미륵불이 도래하는 용화세계를 염원하며 천불천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끝에도 나온다. 못살겠다고 난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패해 도망치던 유민들과 노비들이 운주사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하룻밤에 세우면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오며 자신들이 중심이 되는 개벽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고 정과 망치를 들고 천불천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 넓은 바위에 불상을 새겨 일으켜 세우려고 한 불상은 새벽닭이 울어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와불로 남게 되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황석영의 장길산은 운주사를 대중들에게 미륵성지로 각인시켰다. 하지만 운주사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절이고 장길산은 조선 숙종 때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면 와불이 벌떡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은 고통 받던 민중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을 것이다.  
 가장 가능성 있는 이야기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고려 혜명(惠明)스님이 1,000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는 기록이다. 이 혜명 스님을 논산 관촉사의 대불(일명 은진미륵, 970년 시작 1006년 완성)을 조성한 혜명 스님과 동일 인물로 보는데, 시기적으로는 가장 가깝다. 최근 국보로 승격된다는 18m 크기의 관촉사 대불의 둔중한 모습과 운주사 불상들이 친연성이 있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운주사에 가면 특이하게 생긴 불상과 탑을 보며 왜 저리 못생겼냐고 타박하지 말고 삶에 지친 민초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정성을 다해 만든 것임을 생각하며 누워있는 와불이 벌떡 일어설 날을 기도해 보자.

단순하게 만들어진 운주사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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