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살고 싶어하는 제주에서 우린 왜 불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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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살고 싶어하는 제주에서 우린 왜 불행한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7.1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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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택(제주대 철학과 교수)

(사)붇다클럽 정방회(회장 김부용)가 제주대학교 윤용택 교수를 초청, 지난 6월 14일 인문학 강좌를 마련했다.
윤용택 교수는 ‘제주를 위한 행복록’이란 주제로 강연했는데 이날 주요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편집자주>

 

 

요즘, 행복이 화두입니다. 특히, 청년들이 힘들어 하는데 중학생은 고등학생 진학이 힘들고, 고등학생은 대학가기가 힘들고, 졸업하면 취업하기가 힘들고, 취업하면 결혼하기가 힘듭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행복이 주는 기쁨은 잠시이고,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럼, 늘 불행한 것인가! 어떻게 행복에 대해 말을 할 것인가.
최근 저는 두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됐는데요. 장애인 아닌 장애인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대소변을 해결하지 못한 겁니다. 부인한테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45일 동안 누워 살았는데 저는 앉아 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또 앉으니, 걸어보는 게 희망이었어요. 일상생활에서는 너무 쉽게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두달 동안의 수행(?)을 통해 ‘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대한민국 강남 등 어디에 살고 싶으세요”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제주도에 제일 살고 싶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제주도에 살면서 좋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다양한 인문학 강좌와 제주의 좋은 곳은 제주도민보다는 외지인들이 더 붐벼요. 물론 전국에서 낮은 소득수준과 이에 비해 높은 물가로 고통 받아서 일하기 바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제주도민들은 그런  여유를 즐길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타 지방 사람들은 그것을 다 즐기고 있는 데 말입니다. 
제주도에 좋은 전통도 있고, 역사와 환경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깊게 보지를 못하는 것 같아요. 물론 제주를 떠나 있을 때 제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듯이 사실 거리감을 두고 제주를 바라보고, 제주에 대한 자긍심을 가진다면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철학이 무엇인지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철학은 진짜를 찾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가는 이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어쩌면 잘못된 길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전에 옳고, 그름을 판단해 보자입니다. 
그러면 ‘열심히 살자’, ‘부지런히 살자’, ‘잘 살자’입니다.  
왜? 우리는 열심히 살고자 합니까? 결국 인간답게 살기, 나답게 살기 등 제각각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답게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면 행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모의 욕심, 교사의 욕심 등 커오는 과정부터 다양한 갈등과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장단계부터 자신이 진짜 잘 할 수 있는 것에 투자하고 노력했을 때 행복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지요.

그럼, 인간이 인간답다는 게 뭘까. 
인간은 미완성으로 태어납니다. 최근 3g으로 태어난 미숙아로 태어났지만 인간의 과학과 정성이 깃들어져 건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소나 말들은 태어난 후 몇 시간 만에 걸어 다닙니다. 인간은 돌이 지나야 걷지 않습니까? 그만큼 인간은 태어났을 때는 미약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동물이나 씨앗은 좋은 환경, 유전자만 잘 갖춰지면 잘 큽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렇다 치고, 그럼 나는 누구인가. 
가장 잘 아는 게 ‘나’이고 모르는 게 ‘나’입니다. 그것을 알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속에서 인간은 태어났지요. 우주의 역사는 150억년입니다. 이를 1년으로 압축시키면 하루가 4,100만년이고, 인간의 역사는 12월 31일 오후 8시가 돼야 출현합니다. 지금의 인간적 모습, 즉 호모 사피엔스는 바로 1분 전에 출현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55초 전입니다. 인간의 과학 출현은 바로 1초 전입니다. 
여러분을 그려보면 나 이전에 보모님이 있고, 그 위에 조부모님이 있을 것입니다. 그 위로 수많은 조상들에 의해 여러분들이 태어났을 것입니다. 나는 그물코처럼 얽혀있지 않으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안에 여러분들도 포함돼 있는 겁니다. 한 방울의 물속에 모든 생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화엄사상이라 합니다. 이 작은 먼지 속에 우주가 있습니다. 그 어떤 존재도 가볍게 여길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 생명의 역사는 우주의 역사만큼이나 길고 내 생명의 무게는 우주만큼 큰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노예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돈이나, 이념 그리고 외부시선의 사로잡혀서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얽매이지 않는 대 자유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을 살아가면 이곳에 저곳에 얽매입니다. 
그리고 노예는 아니더라도 객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많아요. 내가 주인이 돼야 함에도 말입니다. 

인문학 강좌를 주관한 정방회원들 단체 사진.


최근에 자신이 사는 자기 집 앞에 쓰레기가 버려져도 줍지를 않아요. 만약에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했다면 분명, 주웠겠죠. 이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제주사람이라면 제주의 자연환경이든, 문화든 즐겨야 함에도  정작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예가 되지 말고 주인이 돼야 합니다. 내 삶은 세상을 무대로 하는 드라마이고, 나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임제선사의 설법을 정리한 <임제록>에 보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이라. ‘가는 곳마다 그곳이 주인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극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돈은 자체가 아닌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내가 1억을 벌고 싶었는데 1천만원을 번다면 그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욕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정리한다면 하고 싶은 것이 있고 이것을 이루면 행복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욕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타인의 시선이 나를 감옥처럼 옥죄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
우리에겐 배고픈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제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살고 있냐”고 물으면 잘 산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정작 행복하냐”고 물으면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한국이 1964년 1인당 GNP는 100달러였지만 지금(2018년)은 3만 달러를 넘긴다고 합니다. 비교 대상이 안 됩니다. 50년 사이에 경제기적을 이뤘지만 불행하다고 답합니다.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돈과 행복은 어느 정도 비례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적정 수준은 1만5천~2만 달러라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를 ‘성장효용 체감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일정수준까지는 소득이 높아짐에 따라 행복지수가 높아지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 이르면 소득이 행복지수에 미치는 영향에 미미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상대성 이론’입니다. 남이 땅을 사면 나는 행복이 아닌 불행이라고 느끼는 겁니다.
또한 이를 ‘디딜방아이론’이라고 합니다. 좋은 환경에 익숙해져서 행복감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새로운 것을 소비할 때마다 행복감은 잠시 올라갔다가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요즘, 지금 언론을 통해 보여지는 광고들로 인해 인간의 욕망은 엄청 커졌습니다. 언론이 욕망을 부채질을 하고 있습니다. 욕망이 커지면 그에 비해 성취욕은 작아지는 겁니다.
우리사회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습니다. 행복하려면 취미생활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의 자아실현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삶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삶의 여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우는 것, 내려놓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힘들어도 내려놓으면 그 안에 다시 채우는 기쁨이 있는데 그게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소유해서 물질적 행복을 얻는 것보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스님이 바로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었죠. 
불교의 핵심은 ‘영원한 것은 없다’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게 진리의 핵심입니다. 이에 따라 살면 행복을 얻지만 이를 부정하면 그곳에서부터 고통이 따른다는 게 사실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라.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면 일체의 고통과 액난을 넘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를 인정한다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보다 진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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