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님의 순교 삼성이야기(3)-지안 스님 입적하던 날, 한라산이 울고 바닷물이 들끓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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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님의 순교 삼성이야기(3)-지안 스님 입적하던 날, 한라산이 울고 바닷물이 들끓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7.2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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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순교성자를 영웅처럼 받드는데 불교에서는 순교성자에 대한 관심이 없다
조천 평화통일 불사리탑사에 봉안된 지안 스님 비.

<편집자 주>한반도의 땅 끝에서 바다 건너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천연의 감옥인 제주섬은 조선왕조 5백 년간 정치범 수용소로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이 유배를 왔다.
대부분 정치범인 유배인들은 비록 죄인의 몸이지만 정치적 배경과 가문의 위세에 따라 유배생활은 천차만별이었다. 천년의 민족문화를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었던 조선시대 억불정책에 맞서 불교중흥을 위해 헌신하다 유배당한 조선불교의 순교삼성인 천태 행호(天台 行乎.?~1447)·나암 보우(懶庵 普雨. 1507~1565)·환성 지안(喚惺 志安. 1664~1729) 은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전남 대원사 주지 현장 스님이 세 분 순교성자 봉찬 다례제를 해마다 올리고 높은 뜻을 기리기 바라는 마음으로 세 스님의 기고문을 보내왔다. 3차례로 나눠 싣는다.

환성지안스님은 조선불교 삼대 순교 성인 중 세 번 째 큰스님이다.
대흥사 13대 대종사 중 6번째 맥을 잇고 있다. 서산 휴정→편양 언기→풍담 의심→ 월담 설제→ 환성 지안으로 조선불교 법맥이 이어진다.
환성은 법호이고, 법명은 지안이다. 1664년 춘천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정씨이다. 15세에 출가하여 26세에 깨달음을 얻어 월담설제의 법을 이었다. 스님의 모습은 진영에서 볼 수 있듯이 우람하고 기품이 뛰어 났으며 성품은 온화하였다.
학식이 뛰어나 불경에 해박했으며 참선할 때는 침식을 잊고 선정에 들었다. 설법할 때는 해박함과 정연한 논리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선지를 펼 때는 수행자들을 무섭게 단련시켜서 수행분위기를 이끌었다. 수많은 제자들이 번뇌구름을 벗어나 푸른 하늘에 오르게 하였다.
지안 스님은 27세에 직지사에서 개설한 화엄법회에 참석하였다. 당시 화엄강주였던 모운 진언 스님은 지안 스님의 학덕과 선지가 깊은 것을 보고 법석을 물려주고 떠났다. 직지사 강원에는 1000명이 넘는 사부대중이 모여들어 스님의 설법을 들었다.
대흥사에서 백일기도를 올릴 때  하늘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세 번 대답했더니 게송이 들렸다.
수미산 같은 불법을 짊어지고 생사의 큰 바다를 건너 중생들을 위해 큰 법문을 베풀되 세상에 들어나지 않게 하여라.
허공에서 게송을 내려준 분은 고려 말의 고승 나옹혜근이었다. 지안 스님은 허공에서 나옹 스님의 게송을 받고 법호를 환성으로 하였다.
1725년 영조1년에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산림법회를 개설하였다. 호남 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1400여명의 사부대중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니 그 모습이 영산회상처럼 장엄하고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는 커다란 감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찌하랴! 수천군중이 모여 법회를 가진 일로 조정의 유생들은 놀라 긴장하였다.
마침 경종독살설로 영조를 부정하는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였다. 질투심에 불타던 조정의 유생들은 환성 지안 스님에게 이인좌의 난에 관여했다는 내란반역죄로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제주도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일주일 만에 스님은 가부좌하고 입적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66세 법납은 51세였다.


그때 기록에 따르면 한라산이 삼일 간 울고 바람도 없는데 바닷물이 3일간 들끓었다.
장례식 날에는 하늘에 무지개가 뜨고 땅에서는 서기가 뻗어 올랐다. 당시 제주사람들이 경탄하면서 성자가 입적하셨다고 외쳤다.
우리 스승께서는 염소창자같이 구불구불한 세상길을 밟아 오시며 호랑이 뿔 같은 흉악한 세상인심을 만났다. 우리 스승 환성 지안 대사께서는 속된 무리들의 모함을 받고 외로운 섬나라까지 끌려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열반에 드셨도다.
오늘의 불자들은 조선불교 순교삼성 천태 행호 스님․라암 보우 스님․환성 지안 스님의 행적을 기억하고 공부하고 추념해야 할 것이다. 그분들의 희생위에 오늘의 한국불교는 존재하는 것이다.
세분 큰스님의 공통점은 선교에 통달하시고 그 당시 살아있는 부처로 존중받았다는 점이다. 세분 모두 유생들의 질투와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갔고 혹독한 고문을 받아 순교했다는 점이다.
세분 모두 유불선에 통달하고 시문에 귀재였으며 많은 문집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유배지가 세분 모두 제주도라는 점이다.
천태 행호 스님은 조선전기 1446년 제주 유배 와서 입적하였다. 라암 보우 스님은 조선중기 1565년 제주 연북정에서 입적하였다. 환성 지안 스님은 조선후기 1664년 제주 어도봉에서 입적하였다.
100년의 시차를 두고 세분 큰스님들이 유생들의 모함으로 제주 유배 와서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혹독한 고문 속에 입적했던 것이다.
조계종단과 제주불교는 조선불교 삼대순교성인 추념행사를 모시고, 조선불교 박해 역사를 재조명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매일 세상을 잊고서 앉아 있노라
봄이 와도 봄이 온줄 알지 못하네
산승이 선정에 드는 것 새도 싫어하는지
창밖에서 산승을 자꾸 부르네

환성 지안 스님이 남긴 선시이다.

천주교 순교는 정부에 의한 탄압이라면 조선불교에서 순교는 유교권력에 의한 박해였다. 천주교는 순교성자를 영웅처럼 받드는데 불교종단에서는 순교성자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
<이번호를 끝으로 현장스님의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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