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 도솔산 선운사(禪雲寺) (1)
상태바
전북 고창 도솔산 선운사(禪雲寺)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7.25 11: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66)
만세루 뒤편으로 보이는 동백꽃 군락지

 

요즘처럼 더운 여름에는 사무실에 앉아서도 집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수박으로 화채를 만들어 한 그릇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개인적으로서 수박을 살 때 고창수박을 고른다. 고창수박을 고르고 맛없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우스 수박이다 보니 다 맛있지만 고창수박은 유난히 더 달다. 아마 물이 좋고 볕을 잘 받았고, 관리를 잘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창에서는 6월말에 수박과 복분자 축제를 하는데, 수박 품질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스테비아 수박, 셀레늄 수박 등 기능성 수박도 생산한다고 한다. 
 복분자와 수박의 고장 고창은 전라북도 서남단에 위치하며, 동북쪽으로 정읍과 부안, 동남으로 전남 장성과 영광군과 접해 있는 인구 57,000여 명의 군이다. 고창은 예로부터 사람 살기가 좋았던 곳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고창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유적지이다. 최근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고창군에만 185개 군집에 1,600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다. 전국에서 고인돌이 가장 밀집해서 분포하는 지역이 바로 고창이다. 고창에서는 들판 가운데 큰 돌들이 무리 지어 있으면 고인돌이라 생각하면 된다. 사실 사진으로 보았던 탁자처럼 세워진 고인돌을 생각하면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탁자형의 고인돌은 북방식이라고 하여 북한이나 만주 지역에 많이 있고 고창에는 몇 기 되지 않는다. 고창 고인돌 대부분은 남방식으로 들판에 박혀 있는 큰 바위덩어리 모습이다 보니 처음 보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2,500~3,000년쯤 전 나무와 끈을 이용하여 그 커다란 돌을 인근 바위산에서 날라다 시신을 묻은 위에 올려놓았다고 상상하면 그 공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고창의 고인돌 군락지는 오늘날로 보면 가족공동묘지다. 당시 영향력 있던 사람은 좀 더 큰 돌로 고인돌을 만들었고 영향력이 작았던 사람은 작은 돌로 만들었을 것이다. 고인돌은 죽은 자가 영생하는 곳으로 고인돌 유적지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고창은 조선시대 말기 역사의 큰 획을 그었던 동학농민전쟁과도 관계가 있다. 1894년 1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항의하여 농민들이 봉기해 조병갑을 축출하고 곡식을 농민에게 나누어 주며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후 정부에서는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고부봉기를 조사케 했는데, 그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자 고창군에 있는 무장으로 피신해 있던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가 포고문을 발표하고 다시 봉기했다.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과 연합하여 호남 일대의 각 군현에 사발통문을 보내 농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 고창의 무장봉기는 고부 고을에 한정되었던 농민 봉기가 전국적인 농민 봉기 단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고장 고창을 답사하기는 4월말에서 5월초가 좋다. 왜냐하면 고창의 대표적인 사찰 선운사(禪雲寺) 뒷산의 동백숲(천연기념물 제 184호)이 빨갛게 물들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카멜리아힐(동백의 영어명이 카멜리아다), 위미, 신흥의 동백나무 군락지, 구좌 메이즈랜드의 동백나무 미로 등에서 겨울 동백꽃을 즐길 수 있다면 고창 선운사에서는 더 늦은 4월말에 동백의 만개를 볼 수 있다. 특히 수령 500년 가까이 된 노목에서 피어난 붉은 동백꽃은 시와 노래로 많이 불러졌다. 이 고장 출신인 시인 서정주는 <선운사 동구>라는 시로 선운사의 동백꽃을 노래했다. 선운사 동구길가에는 서정주가 쓴 이 시의 육필원고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선운사 동구)  

 7080의 대표적인 가수 중 한 명인 송창식도 <선운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지는 꽃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마음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떠나실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 문화재들로 유명한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선운사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첫 번째 설은 신라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한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흥왕이 살았던 당시는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고, 백제 성왕을 죽게 한 왕이기에 백제 지역에 사찰을 창건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개는 두 번째 설에 가능성을 더 둔다. 

고창 출신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동구> 시비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는데, 연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라는 것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