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부처’라는 법화경 가르침 설한‘영취산’
상태바
‘모두가 부처’라는 법화경 가르침 설한‘영취산’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8.07.25 12: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처님 법화경을 설한‘영축산’

제주시 도남동 보덕사(주지 혜전 스님) 신도 등 제주불자 20여명은 지난 6월 3일부터 11일까지 인도 7대 성지순례길에 올라 부처님의 발자취를 좇았다.
9일 동안 부처님의 7대 성지마다 순례하며 왜 부처님이 출가할 수밖에 없었는지 인도의 문화와 환경에서 그 화두를 풀 수 있었다. ㉠보덕사 신도들이 인도로 떠났던 이유 ㉡초전법륜을 굴린 ‘사르나트’ ㉢신들의 고향 ‘갠지스강’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 ㉤부처님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 ㉥최초 비구니 승단의 탄생지 ‘바이샬리’ ㉦부처님 열반지 ‘쿠시나가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 ㉨부처님이 24년간 머무르며 ‘금강경’ 등을 설한 ‘기원정사’를 순례 일정대로 9차례 연재한다.
<편집자주>

 

부처님이 라즈기르(왕사성)의 ‘영취산’에서 대중에게 법화경을 설파할 당시 수백명에 이르렀다하지만 그 정상인 ‘여래향실’에 오르면 아담하지 못해 소박하다. 사진은 영취산의 여래향실.

라즈기르, 붓다 생존시 존재했던 마가다왕국 수도
불교 승단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가 세워지기도

 

법화경의 가르침을 설한 곳, 이제 도남 보덕사 신도들은 라즈기르(왕사성)로 향한다. 라즈기르는 붓다의 생존 시에 존재했던 마가다왕국의 수도였다. 이 마가다국은 ‘고대 16국’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 이런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신흥대국의 빔비사라 국왕 빔비사라는 붓다의 45년간에 걸친 전법 일생에서의 첫 강력한 후원자였다.
왕은 붓다와 그 제자들을 위해 수행처인 ‘죽림정사’를 마련해주고 우안거 동안의 수행지인 영취산으로 가는 전용도로도 닦아주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부친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 아자타사투루왕도 마찬가지여서 이 때 불교는 교단의 기틀을 갖출 수 있었다.
불교는 처음부터 종교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사회 개혁 성향의 신진사상이었을 뿐이었다. 수행자 고타마의 주장은 인간 평등에 있었다. 특히 인도의 뿌리 깊은 카스트제도의 타파에 있었다.
그는 민중에 편에 서서 “사람은 누구나 출생에 따라서 신분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브라만은 출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행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라는 당시에는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선언을 했고 이를 평생 실천한 셈이다.

영취산 입구에 자리한 독수리바위가 그 위엄을 드러낸다.


이는 국왕들의 통치와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원인도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국왕은 브라만의 견제세력으로 불교라는 신흥사상을 이용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의 권력과 금력은 종교라는 집단이 거대해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기에 불교는 부처님이 재세시(在世時) 이미 ‘종교’의 골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부처님은 전법륜의 첫 해라는 중요한 시기를 든든한 후원자 아래서 보내며 수천 년 이어갈 승가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이것이 라즈기르의 불교사적 첫 번째 의미라 할 수 있다. 그 모든 역사의 현장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먼저 불교 최초의 수행처인 죽림정사(竹林精舍)로 향한다. 대나무가 숲을 이룬 것처럼 울창하지는 않지만, 현재도 죽림정사는 죽림 속에, 연못이 있다. 부처님은 수행처로서의 조건으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한적한 곳’이고 연못가에는 공작이 노니는 아름다운 곳이었기에,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3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인도지만 죽림정사 인근도 많은 힌두교인들로 혼잡스러웠다. 이 근처에 유명한 바이바라온천이 있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을 비롯해 제자와 빔비사라왕이 함께 애용하였다는 곳이라 한다. 지금은 힌두교의 성지로, 이날도 목욕 차 들른 힌두교 순례객들로 온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부처님의 숨결을 찾아 도남 보덕사 순례자들이 수천 킬로를 날아왔듯 이들도 40도가 오르내리는 날, 온천욕을 하는 것은 그만큼 종교적 믿음이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사실이다.  
영취산으로 향하는 길목도 온천욕을 향한 힌두교인들의 마차행렬과 오토릭샤가 뒤엉켜 교통대란이다. 그 마차를 요리조리 피하는 우리의 인도 운전사야로 말로 베스트 드라이버다. 버스에서 내려, 영취산 초입에 이르렀다. 대승경전의 꽃으로 불린 법화경을 설한 그곳으로 향하는 길, 부처님도 이 길을 수 없이 오르내리셨으리라. 30여분을 걷는 오르막길이지만 더운 날씨 탓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숨을 몰아쉬며 오르자 중간에 깊지 않은 석굴이 나타났다. 사리불 존자께서 머무시던 곳이란다. 사리불에 제주순례자들은 한 땀 한 땀 절 공양을 올리며 그 수행에 귀의한다.  

영취산 여래향실에서 도남 보덕사신도들.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급한 계단을 오르자 독수리 모양의 바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제주 순례자들은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여래향실로 나아가 공양을 올린다. 그리고 그 땡볕아래서도 잠시 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염화미소(拈華微笑)의 현장 속으로 들어갔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어느 날 설법 도중 갑작스레 한 송이의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셨으나, 모든 대중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었음에도, 가섭존자만이 부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의 법을 가섭존자에게 부촉하시게 된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2500년이 지난 지금 영취산을 당당히 지키는 매서운 눈빛의 독수리 바위는 여전하지만 현실은 인도의 현실이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너무 멀리 와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이 터가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한 자리가 아니던가. ‘모두가 부처’라는 가르침은 그 누구보다 비천한 인도의 ‘불가촉천민’도 부처와 같이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불교 승단 최초의 사찰 죽림정사 연못 앞에서 도남 보덕사신도들.


영취산이 자리한 라즈기르는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던 부처님에겐 낯선 땅이었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 라즈기르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를 흔쾌히 승낙한 부처님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오랜 기간 라즈기르에 머물며 불법을 설파한 것이다. 법화경이 설파된 것도, 불교 승단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가 세워진 것도 이때다. 하지만 영취산에도, 죽림정사에도, 빔비사라왕의 감옥 터도 이젠 그 흔적만이 남았다. 그러나 도남 보덕사 순례자들이 2500년이 흐른 지금도 부처님의 숨결을 이 곳에서 체득할 수  있던 것은 그 위대한 가르침이 영원불멸하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