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국가였다면 인도 여성들의 인권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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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국가였다면 인도 여성들의 인권은 어땠을까!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8.08.01 15:0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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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비구니 승단의 탄생지‘바이샬리’

제주시 도남동 보덕사(주지 혜전 스님) 신도 등 제주불자 20여명은 지난 6월 3일부터 11일까지 인도 7대 성지순례길에 올라 부처님의 발자취를 좇았다.
9일 동안 부처님의 7대 성지마다 순례하며 왜 부처님이 출가할 수밖에 없었는지 인도의 문화와 환경에서 그 화두를 풀 수 있었다. ㉠보덕사 신도들이 인도로 떠났던 이유 ㉡초전법륜을 굴린 ‘사르나트’ ㉢신들의 고향 ‘갠지스강’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 ㉤부처님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 ㉥최초 비구니 승단의 탄생지 ‘바이샬리’ ㉦부처님 열반지 ‘쿠시나가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 ㉨부처님이 24년간 머무르며 ‘금강경’ 등을 설한 ‘기원정사’를 순례 일정대로 9차례 연재한다.<편집자주>

 

도남 보덕사 순례자 뒤로 아쇼카왕 석주와 부처님 수행비서 아난다 존자의 수투파가 보인다.

현재 인도, 뿌리 깊게 내린 남성 우월주의 사회
바이샬리, 야소다라 비롯해 500명 여성들 출가
 

지난 2012년 12월 16일 오후 8시 인도의 수도 델리를 달리던 버스 안에서 조티 신지라는 젊은 여성은 6명의 남성에게 폭행과 강간을 당하고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인도의 정부나 언론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뉘앙스였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더욱 문제를 야기한 것은 인도 남성들의 행태였다.
남성들은 진술서에 “여자가 남자와 디스코 바를 가거나 거리를 배회 할 수 없다. 여자는 집에서 가사일을 해야 한다. 그 여자가 성폭행을 당할 때 저항하지 않았다면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인도에 뿌리 깊게 내린 남성 우월주의 계급의식을 보여준 사례였다. 인도 사회에서도 이를 계기로 큰 변화를 겪는다. 도남 보덕사 신도들이 탄 버스도 성지순례를 원만회향하고 인도 델리의 관문으로 향할 무렵, 운전사 조수가 햇볕을 가려주던 차창의 커튼을 돌돌 말더니 외부에서 우리의 모습이 훤히 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다. 6년 전의 사건으로 모든 버스 안의 커튼을 가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또한 부처님의 성지가 모여 있는 인도 동부 비하르주는 지난 2016년 4월 술 판매를 전면 금지했다. 다른 주 등에서 술을 밀반입하면 최대 종신형으로, 주 내에서 술을 마시기만 해도 최대 7년의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인도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와는 달리 국가적으로 주류 판매와 음주를 금지하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왜 그랬을까. 모든 일에는 결과가 있기 전,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비하루주 출신인 현, 인도의 쿠마르 주 총리가 선거 후보 당시 “저소득층 가정에서 음주 때문에 가난과 가정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성단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면적 금주령 시행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바이샬리의 불교 성지에 세워져 있는 아소카 왕의 석주. 꼭대기에는 사자상이 원형 그대로 완벽하게 남아있다.


서두에 인도의 여성인권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인도가 2500년 전 여성들의 인권을 생각한 부처님의 나라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화두에서 출발했다.
죽림정사를 참배하고 다음 향한 곳이 바로 인도 비하르주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자 최초 비구니 승단의 탄생지인 ‘바이샬리’다.
그럼 2500년 전 부처님의 생존 당시 여성들의 인권은 어땠을까. 불교에서 여성 수행자 문제가 처음 등장한 것은 부처님의 이모 마하프라자파티였다. 마야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부처님을 출가 전까지 키워낸 이모가 남편인 슈도다나(정반) 왕이 세상을 떠나자 부처님께 출가를 청한다. 이때부터 여성의 출가 논의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의 논의에 붙여진다. 부처님의 부인인 야소다라를 포함해 남편이 출가해 혼자 남은 500명의 여성들이 함께 출가를 원한 것이다.
그때까지 출가자에는 여성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출가를 거절한 적이 없었던 부처님께서 여인들의 출가는 모두 거절했다.
여인들은 재차 출가를 청했지만 부처님은 다시 거절하고 바이샬리로 떠나버린다. 그러자 그 여인들은 부처님을 따라 카필라성에서 바이샬리까지 맨발로 따라왔다고 한다.
그럼 평등을 주창했던 부처님이 여성들의 출가는 왜 거절했을까. 여러 정황이 있겠지만 부처님은 여성 출가 자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마음씨로 미뤄 짐작하면, 당시의 인도 사회 여건에 비춰, 여성 출가자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고려해 그 시기를 늦췄을 것이다. 현재 인도의 상황도 그러한데 2500년 전, 쾌락주의가 만연해 성적 타락이 극에 치닫던 현실에서 여성출가자의 수행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는 여성 차별이 심했고, 여성 출가는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였지만 도시국가별로 상황을 보았을 때 그 가능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바이샬리 지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의회제도를 운영, 민주공화 정치를 했던 릿차비 족의 수도였다. 릿차비 족들은 부처님 이전 시대에도 북인도 지역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다. 부처님도 이곳 바이샬리에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도 사회적 파장이 크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부처님은 바이샬리의 성숙된 사회 분위기 속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를 비롯해 바이샬리로 부처님을 따라온 500여 명의 여성들이 출가하게 된다. 그렇지만 성차별이 제도화돼 있던 그 당시 인도사회에서 교단에서 비구니와 비구가 평등하게 참여하는 수행자 조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바이샬리는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한 곳이자 세계 최초의 여성해방의 성지다.

바이샬리 성지에는 부처님 당시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그 당시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바이샬리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도시였던 것 같다. 그러나 2500년이 흐른 지금, 남성들의 가정폭력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금주령까지 내리는 모습에서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쓴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이 밖에도 바이샬리 성지에는 아쇼카 왕의 가장 원형 그대로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 웅장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리고 부처님의 수행비서 아난다 존자의 스투파가 붉은 벽돌로 오름처럼 봉긋하게 솟아있다. 주변에는 원숭이 연못, 화엄경 입품계품을 설한 대림정사 터, 유마경전의 배경으로 굉장히 중요한 유적지들이 부처님의 당시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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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도 2018-08-03 12:01:41
최초의비구니가 탄생한 지역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진 기사 잘 읽고 갑니다~~^^

백록 2018-08-03 11:29:37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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