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의 번뇌 불꽃을 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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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의 번뇌 불꽃을 끄다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8.08.08 14: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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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도남동 보덕사(주지 혜전 스님) 신도 등 제주불자 20여명은 지난 6월 3일부터 11일까지 인도 7대 성지순례길에 올라 부처님의 발자취를 좇았다.
9일 동안 부처님의 7대 성지마다 순례하며 왜 부처님이 출가할 수밖에 없었는지 인도의 문화와 환경에서 그 화두를 풀 수 있었다. ㉠보덕사 신도들이 인도로 떠났던 이유 ㉡초전법륜을 굴린 ‘사르나트’ ㉢신들의 고향 ‘갠지스강’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 ㉤부처님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 ㉥최초 비구니 승단의 탄생지 ‘바이샬리’ ㉦부처님 열반지 ‘쿠시나가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 ㉨부처님이 24년간 머무르며 ‘금강경’ 등을 설한 ‘기원정사’를 순례 일정대로 9차례 연재한다. <편집자주>

 

부처님이 열반을 예감하고 쿠시나가르로 떠난다. 이에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이 부처님을 따르자 이를 따돌리고자 자신의 발우를 건네주고 신통으로 강을 만들어 따돌렸다고 한다. 훗날 리차비족은 이를 기념하고자 세워놓은 탑이 케살리야 탑(발우탑)이다. 현재 한참 복원중인 가운데 목이 잘린 불상 등이 발견되는 등 인도불교의 현실을 고스란히 방증하고 있다.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은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 법륜을 굴린 이래 45년 동안 길에서 쉬지 않고 중생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80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쿠시나가르다.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고 어느 날 탁발을 하고 돌아오는 언덕에서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난다야, 이제 내가 저 아름다운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하고는 석 달 뒤에 열반할 것을 암시한다. 
부처님이 입멸에 들기 위해 바이샬리에서 쿠시나가르로 향한다. 그 소식을 듣고 붓다의 행렬을 쫓아 온 바이샬리의 리차비(Licchavi)족을 만류하고자 부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발우를 건네주고 신통으로 강을 만들어 따돌렸다고 한다. 
바이샬리에서 40km 즈음 떨어진 이곳에 훗날 리차비족은 기단의 넓이 225m, 높이 52m에 이르는 발우를 엎어 놓은 모양의 거대한 케살리야 대탑(발우탑이라고도 불림)을 세워 이를 기념했다. 이 대탑은 인도에서 현존하는 스투파(탑) 중에서 가장 큰 스투파다.
도남 보덕사 신도들도 바이샬리에서 쿠시나가로 향하던 길에 케살리야 대탑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스투파의 절반은 발굴을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나 있다. 그에 반해 아직 발굴하지 않은 곳은 자연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대형 스투파의 각 층에는 과거 수행자들이 수행의 공간으로 짐작되는 감실이 있고, 그 감실마다 부처님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충격적인 것은 온전한 불상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목이 잘려나가고, 팔이 부러져 있는 등 제주 순례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수천 년의 인도 불교의 모진 풍파를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 같았다. 이를 보며 문득 한국불교의 가장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던 통일신라시대 경주 남산의 목이 잘려나간 부처님이 떠올랐다. 그 이유에 대해 갖은 설이 있으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조선시대 유생들이 석불의 목을 부러뜨려 계곡이나 우물 속에 버렸다고 전해진다. 

쿠시나가르 열반당에서 제주순례자들이 부처님께 가사를 수하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도남 보덕사 순례 일정에 포함됐던 인도의 나란다 대학도 이와 같았다. 대학의 전성기는 5~12세기 약 700여 년 동안 불교의 총림은 물론 불교학 이외에도 인문학, 철학, 수사학, 자연과학 등 학문도 폭넓게 연구되는 명실상부한 최대 대학이었다. 당시 8500여 명의 학승과 1500여 명의 교수진 포진하는 등 지금 하버드대학의 명성보다 드높았다. 하지만 1193년 아프간 가즈니에서 밀고 내려온 이슬람 군에 의해서 번성하던 나란다 대학은 갑자기 역사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종교의 다원주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린 날마다 목숨을 건 전쟁과 피를 뿌리는 투쟁의 삶으로 점철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부처님은 리차비(Licchavi)족을 멀리하고 쿠시나가르로 향한다. 부처님은 빠와(pava)마을에서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의 돼지우리에서 자생한 버섯요리를 공양받는다. 하지만 버섯요리가 상한 것을 미리 감지하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먹지 못하게 하고 혼자만 먹는다. 나머지 음식은 먹지 말고 땅에 파묻으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상한 음식을 알면서도 공양 받았을까. 이미 열반을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은 가장 큰 은혜이고, 만족은 가장 큰 재산이다. 믿고 의지함은 가장 귀한 벗이고, 열반은 가장 높은 행복이다”-법구경 ‘행복장’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열반의 세계. 그러나 중생들은 죽음을 보고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무엇일까. 이 육신을 생명의 주인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육신 소멸이 내 생명의 영원한 가치를 실현해 나가는 것임을 몸소 보이신 셈이다. 
이 같은 가르침에 환희심으로 가득한 도남 보덕사 신도들은 열반지 쿠시나가르에 도착해 부처님 열반상에 씌워드리기 위한 가사를 넓게 펼쳤다. 입구에서 열반당까지 석가모니불을 정근하며 죽음조차도 제자들에게 무상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 그 가르침에 귀의했다.
머리는 북쪽에 두고 얼굴은 서쪽으로 하여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모로 누워 편안히 눈을 감으신 부처님께 부처님 상에 가사를 수해 드린, 도남 보덕사 신도들은 부처님의 설하신 경전을 읊는다. 열반이란 산스크리어로 ‘니르바나(Nirvana)’로 ‘불어서 끈다’라는 뜻이다. 부처님도 그러했듯이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번뇌의 불꽃을 도남 보덕사 신도들도 기도의 굵은 땀방울로 배출해 내고 있었다. 

부처님께 수할 가사를 들고 열반당까지 석가모니불을 정근하고 있는 제주순례자들.


이 열반당은 12세기 무슬림의 침공에 의해 사원이 모두 불에 타버린 것을 1876년 복원을 거쳐, 1956년 미얀마 스님들에 의해 재건 됐다고 한다. 열반당 안에는 열반상이 있는데 6m에 이르는 부처님은 발굴 당시 파손되었으나 19세 말 복원작업을 통해 지금에 이르게 됐다.
열반상 하단부에 보면 3명의 인물이 새겨진 것이 특이하다. 부처님의 머리 쪽에 슬픔에 잠겨 울부짓는 ‘말리카 부인’, 중앙에는 열반상의 기부자 ‘하리발라 스님’, 다리 쪽에는 슬픔에 젖은 ‘아난다 존자’ 상이 있다.
열반당은 내리쬐는 햇볕에 달궈져 찜통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도남 보덕사 순례자들은 열반당에서 부처님이 설한 경전을 독송한다. 그 가르침을 좇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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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 2018-08-10 11:27:43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이 길들이 세계인에게 불심으로 다가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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