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광사 50평 기와법당, 4.3당시 강제로 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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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광사 50평 기와법당, 4.3당시 강제로 헐려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08.0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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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3> -납원읍 '선광사'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50평 규모의 기와법당이 4.3당시 토벌대에 의해 강제로 헐리는 아픔을 격은 남원 선광사. 그 당시 유일하게 보존되어 오늘에 이른 목불에 대해 수열 스님이 설명하고 있다.

강선일 보살 시주로 제작된 목불, 4.3 오롯이 기억
보화당 법인 스님, 남원주민들에 관세음보살의 화신

1970년 말에서 80년대 초 만하더라도 도내 사찰은 기와를 얹은 전통양식보다 슬레이트 지붕이 많았다. 그만큼 제주지역 사찰 환경이 열악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하지만 한국불교 태고종 남원 선광사(주지 수열 스님)는 이야기가 다르다. 1984년 당시만 하더라도 장엄한 대작불사를 이룩하게 된다. 대웅전과 사천왕문, 범종루, 전통한옥 양식인 요사와 정재소가 함께 신축되고 도내 사찰 최초로 사천왕상과 2.5m 크기의 동으로 조성된 석가모니불을 새롭게 봉안하는 등 제주지역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사찰 면모를 갖추면서 그 위상을 높여나간다.
1972년 27세에 선광사 3대 주지로 취임한 수열 스님은 자신에게 닥친 현실 앞에 주저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힘을 가졌다. 이 같은 힘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DNA가 가장 큰 유산 같았다. 
남원 선광사는 지난 1942년 수열 스님의 부친이신 보화당(普化當) 법인(法印) 스님이 현 위치에 초가법당을 건립 후 1945년 50평 규모의 기와법당을 건축하면서 사격을 높인다. 수열 스님의 집안은 남원에서도 재력을 가진 유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은 당시 일본에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엘리트였다. 그곳에서 인연 있는 스님을 만나, 불교에 귀의하며 출가한다. 일본에서 귀국할 당시에도 신도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집안 환경과 불연들이 만나, 당시 대부분 사찰이 초가법당인 것에 비해 기와법당이라는 대작불사를 이뤄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하지만 장엄한 법당은 1948년 4‧3이 발발하면서 표적이 된다. 토벌대는 목재가 좋은 것이라는 이유로 불 지르지 않고 해체한다. 그리고 객실은 방화에 의해 모두 불타버렸다. 법당 목재는 후일 남원중학교 교사건축 자재로 쓰였다. 
“당시는 면장이나 이장의 말이 곧, 법이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부친께서도 마음으로만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당시 법당에 흙으로 조성된 부처님은 이운하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훼불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1942년 강선일 보살의 시주로 제작되어 선광사에 봉안된 79cm 높이의 목불은 선광사 인근에 목재로 비가림을 해 놓았다. 4‧3이 안정되고 다시금 불사를 일으키며 그 목불을 봉안하게 된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으로 기억돼요. 4‧3이 평정된 후 법인 스님께서는 함석으로 된 10여 평 규모의 법당과 객실 등을 지으면서 다시 불법을 펴기 시작하십니다.”
하지만 1954년에 이승만의 담화에서 비롯된 종단의 분규인 불교정화운동은 불교의 위상만 떨어뜨렸을 뿐 그 어떤 명분도 없었다. 결국 분규에 싫증을 느낀 원인상 스님을 비롯해 보화당 법인 스님의 은사인 방동화 스님 등이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법화종 창종에 불을 지피고자 노력했지만 보화당 법인 스님은 1960년 대 초 지병으로 아미타부처님의 품안에 안기게 된다.  
스님은 “제가 14살 무렵이었어요. 1960년대 초 부친께서 그 당시는 ‘윗병’이라 말했는데 지금의 ‘위암’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연스럽게 선친이 일찍 입적하시면서 동진출가를 하게 됩니다. 열여섯에 현 정방사에서 행자생활을 하게 되면서 태고종과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선광사가 법화종단에 소속 된 사찰이 될 뻔 했지요.”
보화당 법인 스님은 4‧3으로 사찰이 강제로 헐리는 아픔을 겪었지만 지역민들의 아픔과 슬픔을 보듬는 동체대비(同體大悲) 마음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스님은 4‧3과 한국전쟁이 평정될 무렵, 남원 이장을 맡는다. 그 당시 피난 온 수많은 이주민들이 제주로 몰려들었다. 스님은 이들을 사가에서 보살피고, 미국 구호물자가 오면 이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는 등 남원지역 사람들에게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선광사

선광사는 남원읍 남원리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사찰이다. 보화당(普化當) 법인(法印) 스님(속명 현재봉)은 1941년 방동화 스님을 스승으로 출가하고, 1942년 선광사를 창건하였다. 초가 3간의 법당과 객실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성하였다. 1945년에는 50평 규모의 목조 기와 지붕의 법당을 신축하였다. 1948년 11월 제주4․3사건에서의 남원리 피해 기간 중 선광사도 토벌대에 의해 법당이 완전히 해체되어 파옥되었다. 목재가 좋은 것이라는 이유로 불 지르지 않고 해체하였다고 하며 객실은 토벌대가 방화하여 모두 불타버렸다. 법당 목재는 후일 남원중학교 교사건축 자재로 쓰였다. 흙으로 조성하였던 불상이 이때 파손되었고 선광사는 주민들과 함께 남원 1리로 소개되어 사찰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소개하면서 절 앞 밭에 모셔두었던 작은 목조 불상이 지금 선광사에 모셔져 있다. 1955년 석조 함석지붕의 15평 법당과 초가 요사 두 채를 재건해낸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으로 제주도민을 무차별 살해하고 있었다. 무장대는 1948년 11월 28일 남원지서와 남원리를 습격하였다. 남원지서에는 육지부에서 파견되어 온 응원경찰 20여 명을 포함한 30여 명의 경찰이 주둔하고 있었다. 서북청년단 출신의 남원지서 주임 김승추를 중심으로 경찰은 마을 사람들을 도피자가족으로 지목하거나 혹은 아무 이유 없이 만나기만 해도 무차별로 때리거나 총살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또한 다수의 군경이 주둔하며 군경을 도와주는 마을 사람들이 많다는 판단이 되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무장대는 이러한 상황 등에 대해 군경과 군경을 돕는 남원리 주민 등에 대한 보복으로 남원지서와 남원리를 습격하였다. 무장대의 습격으로 주민 30여명이 사망하였고, 무장대는 집을 불태우고 식량을 약탈하였다. 
토벌대는 소개령과 계엄령 이후의 강경진압 작전 중인 시기인데도 경찰지서가 습격당한 것을 중대한 사안으로 보고 바로 보복 학살을 시작하였다. 소개되어 내려온 주민들은 입산자라는 이유로 처형하였고, 무장대가 습격하였을 때 피해를 보지 않은 주민들도 또한 가려내어 총살하였다. 남원리는 토벌대와 무장대 양쪽으로부터의 많은 인명의 사상과 가옥의 방화 등의 큰 피해를 입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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