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전각 3개소 전소…위세 당당했던 부악사(釜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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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전각 3개소 전소…위세 당당했던 부악사(釜岳寺)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8.1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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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4>-한경면 청수리‘영축사’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가마봉 상봉 북녘 기슭에 자리했다하여 부악사
부악사, 기원사, 영축사서 봉안한 목조여래좌상
 

부악사, 기원사, 영축사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

청수리 가마봉은 남쪽의 큰 봉우리 등성이가 서북쪽으로 휘돌아 상봉, 중봉, 하봉이 ‘ㄷ’자 모양의 가마를 닮았다하여 가마오름이라 붙여졌다. 이 형세가 가마[釜]와 같다는 데서 가메 오름 또는 가마 오름이라 부른다. 그 가마봉 상봉 북녘 기슭에 자리했다하여 부악사(釜岳寺)라 불렸다. 부악사는 지난 1933년 갑술년에 김경호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당시 한경면에는 지난 1932년 제주불교 중흥조 안봉려관 스님의 의해 고산 월성사가 창건됐고, 1934년 양경수 거사의 부지를 시주받아 김화표 스님이 1934년 판포 통천사를 창건하면서 이 지역에 불법 홍포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중산간 지역인 저지와 청수의 불자들을 위한 불법도량 ‘부악사’의 창건은 이 지역 불심이 무르익었다는 방증이다. 
경호 스님에 이어 2대 주지로 월봉 스님은 해남 대흥사에서 대교과를 수료 후 부악사에 감원으로 발령받는다. 통천사 김화표 스님의 아들이기도 하다. 4·3이 발발하기 이전이었다고 월봉 스님의 상좌였던 광수 스님은 부악사에 대해 기억해 냈다.  
“청수 인근 낙천이 제 고향입니다. 당시 제가 10살 무렵이었는데 어머니를 따라 부악사에 동지기도를 따라갔어요. 당시 부악사 위세가 가히 당당했습니다. 사천왕상이 그려진 일주문에 요사채 그리고 대웅전이 초가집이 아닌 모두 기와였어요. 저지와 청수는 물론 월림, 영락, 무릉에서까지 신도들이 기도처로 삼았기 그 위세가 어마, 어마했어요. 기도 때가 되면 요사채와 법당 안이 신도들로 가득했어요.”
그러나 제주 최대의 아픔 1948년 4·3일 발발했고, 그해 10월 20일 ‘해안선에서 5km 이상의 지점과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한다’고 포고하게 된다. 부악사의 위세도 하루아침에 꺾이고 만다. 당시 월봉 스님의 친동생이 저지에 경찰로 근무할 무렵이었다. 동생은 하루 빨리 해안마을로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줬고, 시급함을 알게 된 스님은 모셨던 부처님(목조여래좌상)을 등에 짊어지고 판포 통천사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가만히 있었다가는 스님의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결국 토벌대에 의해 위풍당당했던 부악사는 불 질러졌고, 폐사하기에 이른다. 그 흔적은 옛 기와만이 흩어져 그 당시의 위용을 증명할 뿐이다.
부악사가 폐사됨에 따라 월봉 스님은 이곳저곳 사찰의 기도 스님으로 있다가 모슬포 대승사 주지 비구니 스님이 입적하면서 대승사에 주지로 주석하게 된다. 그 무렵 광수 스님은 이름 모를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 월봉 스님은 침과 탕약에 능하셨는데 광수 스님의 모친은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낙천에 월봉 스님을 모시게 된다. 삼주 동안 매일같이 침과 탕약을 끓여 결국 기적적으로 광수 스님은 새생명을 얻는다. 그 후 광수 스님의 어머니 제안으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부처님을 봉안하자는데 마을 유지들이 뜻을 같이하면서 1954년 낙천에 ‘기원사’가 창건된다. 기원사에는 4‧3으로 어쩔 수 없이 통천사에 모셨던 불상을 다시 기원사로 이운해 봉안하며 이 지역의 불법 홍포 메카로 삼는다.

고향이 한경면 낙천인 광수 스님. 4.3일 발발할 무렵이 10살이었지만 당시 부악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스님은 전소가 된 부악사 위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뒤로 영축사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 한창 4·3재건으로 이동도 자유롭지 않았고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타버려 자신 집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불자들은 자기 집은 못 짓더라도 기원사를 짓는 데는 모두가 동참을 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어 가면서 부악사를 중건해야 한다는 신도들의 의견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 당시 관음회가 조직되었고, 당시 전소된 부악사 부지는 150평으로 협소했는데 크게 중창을 염두하고 현 영축사 부지를 매입한다. 1961년 임인년 오두막을 지은데 이어 1964년 을사년 초가 대웅전과 종각을 갖추고, 기원사의 불상을 다시 모셔오면서 여법한 옛 명성을 이으면서 다시금 불법이 피기 시작한다. 새롭게 불사를 중창한 만큼 부악사에서 사명을 개명, 영축사라 명명했다. 그 이유는 가마봉 인근에 큰 암석이 하나 있는데 그 인도 영축산에 있는 독수리 모습을 닮았다하여 ‘영축사’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영축사

영축사는 한경면 청수리 1223번지에 있다. 지금의 영축사는 부악사의 뜻을 이어 새로운 부지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제주4·3으로 잃어버린 사찰, 부악사는 청수리 1205번지 가마오름 언덕에 있었다. 부악사는 원래의 자리로 복원되지 못하였다.
부악사는 1943년 대흥사청수포교당으로 신고 되었고, 김경호 스님이 창건하였다. 제주4·3으로 사찰이 전소되었다. 제주4·3 당시에는 2대 주지 월봉 스님이 부악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소개령 직전 당시 월봉 스님의 속가 동생인 김태원 저지파출소장이 당장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불상을 바랑에 지고 판포 통천사로 소개하였다. 법당과 요사채, 일주문 3동이 모두 토벌대에 소각되었다.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지 않은 지경에 외따로 가마오름 언덕에 부악사는 있었다. 토벌대는 소개시키며 마을에 불을 지르는데 부악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악사는 제자리로 재건되지 못하였고, 월봉 스님도 부악사로 돌아오지 못하고 모슬포 대승사에 주석하기도 하였다. 부악사 옛터에는 지금도 기와 파편이 많이 남아있다. 현 영축사의 광수 스님 모친이 월봉 스님과 함께 고향 낙천리에 기원사를 지은 적도 있고 현재 영축사 자리에 다시 법당을 지었다. 부악사의 불상은 지금 영축사 법당에 모시고 있다.
부악사를 창건한 김경호 스님은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 영락사 대표로 출석한 기록이 있다.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는 해방을 맞아 친일불교를 청산하고 전통불교의 수행 정신으로 불교를 재건하겠다는 대회였다. 제주도승려대회로 제주교무원이 설치되었고, 강원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대중불교를 실현할 것, 육식 금지 및 화주 사찰 거주 금지 등으로 사찰을 정화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또한 건국정신을 진작하고자 하는 노력도 의결하게 되는데 이는 해방으로 제주불교도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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