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에게 설했을 그 숨결과 만남, 환희와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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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설했을 그 숨결과 만남, 환희와 감동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8.2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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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24년간 머무르며 ‘금강경’등을 설한‘기원정사’

제주시 도남동 보덕사(주지 혜전 스님) 신도 등 제주불자 20여명은 지난 6월 3일부터 11일까지 인도 7대 성지순례길에 올라 부처님의 발자취를 좇았다.
9일 동안 부처님의 7대 성지마다 순례하며 왜 부처님이 출가할 수밖에 없었는지 인도의 문화와 환경에서 그 화두를 풀 수 있었다. ㉠보덕사 신도들이 인도로 떠났던 이유 ㉡초전법륜을 굴린 ‘사르나트’ ㉢신들의 고향 ‘갠지스강’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 ㉤부처님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 ㉥최초 비구니 승단의 탄생지 ‘바이샬리’ ㉦부처님 열반지 ‘쿠시나가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 ㉨부처님이 24년간 머무르며 ‘금강경’ 등을 설한 ‘기원정사’를 순례 일정대로 9차례 연재한다.  <편집자주>

 

도남 보덕사 순례자들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의 숨결을 느끼며 환희심에 젖었다.

 

인도 문화 수출품 중 최고 성공작은 불교문화
유적지마다 벽돌 잔해만 남았어도 신심이 절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8일부터 11일까지 인도를 국빈 방문했다. 문 대통령은 인도인 80%이상인 힌두교와 13%를 차지하는 이슬람교의 대표 성지를 방문한데 이어 국빈 방문 마지막 날 만찬에서는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한국 전통문화의 뿌리가 됐다”고 강조했다.
인도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한국의 전통문화가 된 불교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인도의 심장부에서 불교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인도 문화 수출품 중 최고의 성공작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는 2000년 동안 동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매개체가 됐고 지금도 수억 명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 인도의 부처님 성지마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 티베트, 미얀마, 태국 등의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2500년 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한 열반의 경지에 이른 부처님을 좇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자취를 좇는 머나먼 거리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교통망이 좋아질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는 그 발걸음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도남 보덕사 순례자들도 그랬다. 불자라면 꼭 한번은 가봐야 할 성지가 바로 인도의 부처님 7대 성지를 순례하며 환희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도남 보덕사 순례자들의 인도 성지의 마지막 순례지는 부처님이 24년간 머무르며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의 무대가 됐던 기원정사(祈園精舍․제타와나)였다. 붓다와 제자들이 생활하던 승원․처소와 스투파(탑)의 잔해들이 붉은 벽돌 기단으로 부분적으로 복원되거나 허물어진 채로 순례객을 맞았다. 옛 채취만이 번성했던 옛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보게 한다. 순례자들은 중국 현장 스님의 인도 기행문 <대당서역기>에 전단향 불상이 모셔져 있던 것으로 기록된 간다쿠티(향실․香室) 터에서 40도가 오르내리는 뙤약볕이었지만 정성스럽게 삼배를 올린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했을 그 숨결과의 첫 만남, 순례자들은 내내 환희와 감격에 젖어든다.
부처님이 24년 동안 우안거(雨安居)를 지낸 기원정사는 드넓은 잔디밭과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순례자들은 뙤약볕을 피해 커다란 나무그늘에 앉아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이 즉문즉설로 이뤄졌던 금강경을 독송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날 세존께서 사위성(舍衛城) 밖의 ‘기수급고독원’에 비구 1,250인과 함께 머무르고 계셨다. 이때 세존께서는 공양하실 시간이 다가오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가사를 걸치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에 들어가셨다.~”
기원정사는 부처님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던 코살라 국왕 푸라세나릿과 뒤이어 마우리아 왕조 ‘법륜성왕’ 아쇼카 왕에 의해 중수되었다고 한다.
특히 부처님이 거주했다고 전해지는 7층짜리 건물인 ‘간다쿠티(향실)’는 화재로 이미 터만 남은 상태에서 이후 벽돌로 중건됐다고 한다. 향실은 부처님이 거주하셨다는 곳으로 기원정사를 찾는 사람들이 가져온 꽃과 향이 언제나 가득한 집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마지막 일정으로 찾은 기원정사에서 도남 보덕사 순례자들이 부처님께 예경을 드리고 있다.


향실에는 부처님 당시 수많은 참배객들이 방문했을 것이다. 비단으로 만든 깃발과 덮개들이 사방에 걸리고 등불이 밤낮으로 밝혀져 있었는데 어느 날 쥐가 등불을 건드려 불이 붙어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며칠 뒤 타버렸을 것으로 알았던 백단향으로 만든 불상이 동쪽 사원에서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발견됐고 그 자리에 다시 2층으로 사원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고 전해진다.
기원정사 경내에는 보리수 한 그루가 천년의 세월을 드리우고 있다. 이 나무는 부처님의 비서실장(?)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이 깨달은 보드가야에서 나누어 심었다고 전해진다. 아난다 존자가 누군가.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다. 아난다는 평생 부처님의 옆자리를 지켰다. 스승과 제자가 그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했을 그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에 앞서 도남 보덕사 순례자들은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는 자리한 앙굴리마라 및 수닷타 장자 스투파를 참배했다. 
수닷타 스투파는 당시 코살라국의 부자로 붓다에게 기원정사를 지어 기증한 수닷타 장자의 집터에 세워졌다. 
앙굴리말라는 100명의 손가락뼈로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99명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다.
그 옛날 기원정사 숲 속에는 수행 중에 악마의 꾐에 빠져 천 개의 손가락을 당장 모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수행자가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이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의 ‘앙굴리마라’였다. 빨리 깨닫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품고 살인마가 되어 숲 속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사냥했고 그 숫자를 기억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녔다. 마을은 공포에 빠졌고 그 소문을 들은 부처님은 그를 만나러 숲으로 갔다. 부처님을 발견한 살인마는 불시에 부처님을 습격했지만 좀처럼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분노가 치민 살인마는 “거기 멈추어라”라고 소리쳤고, 이에 신비스런 걸음을 멈춘 부처님은 그를 돌아보며 “자 이제 나는 멈추었다. 이제는 네가 멈춰야 할 때다”라는 그 한 소리에 죄업에 물들었던 살인마는 제 정신이 들어 부처님 발에 엎드려 회한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앙굴리마라는 죽은 이들의 가족들에게 냉대를 묵묵히 속죄했고 그 여생을 마칠 무렵 ‘아라한과’를 이뤘다고 전해진다.
인도 불교성지 유적지들은 비록 벽돌로 남은 잔해만이 쓸쓸이 역사를 고증한다. 하지만 순례자들은 단지 보고 있어도 저절로 신심이 솟구치는 강열함을 느낀다.  
*그동안 인도성지 순례기를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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