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괴롭히지 않는 무심함으로 나아가야”
상태바
“정신을 괴롭히지 않는 무심함으로 나아가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8.29 14: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혜국스님

이번호 지상법문은 석종사 금붕선원장 혜국 스님의 《신신명》강설에서 뽑았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불호노신 하용소친’이란 말에서 사람만이 좋고 나쁨이란 분별심을 내어 정신을 괴롭힌다고 합니다. 괴롭히는 이 생각을 놓아버리고 무심한 상태로 나아간다면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평화롭고 안정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편집자주>

 

 

 

 

말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설근인데 
듣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이근이라
이름만 다를 뿐 육근의 체는 같아

“불호노신不好勞神커든 하용소친何用疎親가.”
“정신을 수고롭게함이 좋지 않거늘 어찌 멀리하고 친함을 쓸 것인가.”
친하고 멀리함이 있어서 정신을 괴롭힌다는 이 말은 평등성인 우리 본마음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동안 자기 스스로 정신을 괴롭힙니다. 거의 혹사시키는 정도입니다. 
몸은 피곤하면 쉬어주기도 하고 아프면 치료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정신은 몸이 쉬는 휴식시간에도 계속 괴롭힘을 당합니다. 이 정신은 다른 사람이 괴롭힐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이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신을 괴롭히고 괴롭히지 않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고 순전히 내 탓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가슴에 부여잡고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다시 떠올려 생각하기를 반복하면서 정신을 괴롭히는데 주로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1959년 9월 한반도를 지나간 ‘사라호’라는 태풍이나 2003년 9월에 ‘매미’라는 큰 태풍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입힌 피해는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태풍을 부여잡고 태풍을 상대로 소송을 하거나 다투느라고 정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말은 태풍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마음에 붙들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생각에서 내려놓았다는 말입니다. 
생각에서 놓아버리면 정신을 괴롭힐 일이 없습니다. 내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어서 정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얘기는 내 자신이 과거를 붙들고 있으면서 놓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의 상처나 분노는 모두 내 자신이 붙들고 있으면서 놓지 못하는 내 감정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사를 붙들고 환영과 싸우고 있습니다. 
한 번 지나가버린 강물에 두 번 다시 손을 씻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이 이미 지나간 일은, 사실은 현재에 없는 일인데 우리가 환영에 속는 것입니다. 태양 빛이나 대지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이 좋다 나쁘다는 분별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허공은 믿음 그 자체라 좋다 나쁘다 하는 생각 자체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심 상태이니 이렇게 믿는 게 참믿음입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이 된다면 친하고 성김만 없는 게 아니라 정신을 괴롭힐 생각 자체가 없어진다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불호노신 하용소친’이라는 가르침은 우리에게 소중한 보배를 보여주는 길이요, 언제 깨달아도 깨달아야 할 본래 고향소식입니다. 

그 다음으로 “욕취일승慾趣一乘이어든 물오육진勿惡六塵하라”고 합니다.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정신을 괴롭히는 원인은 육진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일승과 육진은 경계가 없습니다.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승은 무상대도를 의미하지만 말로 설명이 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론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직접 체험해 자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육진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세상에 싫어할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요, 좋고 나쁜 양변을 초월했다는 뜻입니다. 양변을 여읜 중도 즉 연기공성이 일승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육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눈, 귀, 코, 입, 몸, 의식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을 구비하고 나옵니다. 육근에서 작용이 일어나면 눈은 색 즉 경계를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입은 맛을 보며, 몸은 촉감을 느끼고, 의식은 온갖 생각을 일으킵니다. 주관인 육근이 만나는 객관 즉, 색, 성, 향, 미, 촉, 법 여섯 가지 상대를 육진이라고 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육근이란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 귀, 코, 입, 몸 다섯 가지와 내부에서 정보를 분석하는 의식으로서, 여섯 가지 주관을 말합니다. 
다섯 가지 오근은 외부에서 색성향미촉 다섯 가지 경계를 받아들이고 내부에서 정보를 분석하는 의식은 온갖 삼라만상이라는 현상계 즉 일체 세상법을 판단하고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판단하는 의식이 사실 있는 그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자기가 축적해놓은 경험 즉 업에 의해서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판단이 객관적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이라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온갖 분별로 채색된 허구적인 차별상인 변계소집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근이란 업의 그림자요, 육진이란 육근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주관인 눈이 객관인 색을 만나면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을 일으킵니다. 또는 ‘저 산에 핀 들국화가 흰색이다 보라색이다’라고 분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귀로 음악을 듣고 있다고 할 때 그냥 듣기만 한다면 귀는 이근이요, 소리는 성진인데 거기에서 이 음악 소리는 클래식이다 판소리다 흥타령이다 하고 분별하는 식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분별이 내 잠재의식에 익힌 습관에 따라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식을 만들고 나아가서 색성향미촉법에 따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육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근, 육진, 육식을 합해서 십팔계十八界라고 하는데 우리가 보고 듣고 모든 세계가 십팔계안에 이루어집니다. 
이 몸을 자동차라고 한다면 자동차가 달리는 것도, ‘빵빵’하며 소리를 내는 것도, 자동차를 세우는 것도 모두 운전사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전사가 모든 걸 움직이니 운전사는 일승이고 자동차는 육근 육진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이미 알음알이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운전사와 자동차가 하나가 되어야 속도를 내고 달리는 자동차가 되는데 이때는 자동차와 운전사가 둘이 아닙니다. 운전사와 자동차가 하나가 되어 속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설근舌根인데 듣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이근耳根이라고 하니, 이름만 다를 뿐 육근의 체體는 같습니다. 
과연 육근이 작용하는 그 업이 어디서 나왔습
니까. 우리들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로 한 생각 일으킨 결과물입니다. 큰 파도건 작은 파도건 모두가 바닷물에서 나온 것입니다. 애당초 바닷물입니다. 육근이라는 파도건 육진이라는 파도건 한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 생멸하는 연기공성을 깨달으면 보고 듣는 육근 육진 그 모두가 일승인 것입니다. 
《신신명》에서는 이 모든 말과 생각에서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멸한 자리를 보여주려고 이렇게 고구정녕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일승의 세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일승의 세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