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위한 소도리 - 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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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위한 소도리 - 신심
  • 여래심 정인숙 객원기자
  • 승인 2018.08.2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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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이 없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시대, 정서가 불안하다. 삶의 고뇌, 번뇌 망상이 들 때, 늘 찾던 곳이 부처님 도량이다. 불교는 수년간 가장 가까이서 선지식으로 믿고 의지해왔다. 지극한 마음으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날처럼 우러러 지극한 마음이 덜하다. 무엇 때문인지 신심이 예전 같지 않다. 
 지난 시절, 부처님 뵈러 사찰에 가면 마음이 참 편안했다. 삶이 버거워 어디에 매달리고 싶고, 하소연하고 싶을 때, 종종 사찰을 찾아 부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쌓인 번뇌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또 부처님의 진리의 의미를 모를 때는, 지극한 정성으로 발원하면 부처님이 알아서 다 들어 주신다고 믿고 의지해 왔다.
더불어 사찰에서 법사스님은 부처님이시라고 우러러보고, 친견하면 환희심도 느꼈다. 어느 때는 스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도 어려워 옆면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특히 법회에 동참하여 법사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늘 깨달음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담아두어, 간혹 생활 속에 접목하거나 갑자기 어려운 일이 봉착했을 때, 꺼내 쓰는 소중한 지혜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소박하고 고즈넉한 도량은 내 마음의 쉼터였다.
 하지만 혼탁한 요즘시대는 신심이 어떤가! 예전과 달리 불심이 메말라 간다. 절에 가서 법사스님 법문을 듣고, 번뇌에 찌든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데  불심이 증장되지 않는다. 더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종교지도자의 모습이 진실로 부처님의 진리대로 살아가는지 의문이 나기도 한다.
종교지도자가 세속의 삶, 물질만능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인과를 믿고, 그 인과에 철두철미함으로써 어리석지 않고, 지혜롭게 살기 위한 진정한 뜻이 있다고 대중들에게 설법한다. 붓다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전할 때, 진정 실천적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침을 전해주는지 알 수가 없다. 종교지도자들이 위로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오로지 경전과 글로만 진리를 가르친다면 진정 재가불자들이 깨달음을 얻겠는가! 그저 가고 올 뿐이다. 
 요즈음은 신문이나 뉴스를 보는 것이 곤혹스럽다. 불심도 불편하게 한다.  부처님의 법대로 살겠다고 하신 종교지도자들이 부처님의 법대로 살고 있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게다가 전 국민을 상대로 떳떳하지 않은 사생활을 숨기려는 종교지도자, 어떻든 밝히려는 종교인, 불교에 치명타가 아닐 수 없다. 또 목숨 걸고 단식하며 주장을 내세우는 종교지도자, 또 서로 책임지고 분쟁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책임지는 지도자도 없다. 오히려 일을 만들어 서로 반목하고, 투쟁하고, 편을 가르는 현상만 눈에 띈다. 분쟁의 깊은 의미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매스컴에 불미스럽게 뉴스거리가 되는 것이 안쓰럽다. 
 한편 재가불자 가운데도 종교지도자 규탄 데모에 가담하는 불자, 더불어 부화뇌동 합세하여 충동질을 하는 불자 역시 종교인의 민낯이고 불미스러운 모습이다.
그렇다고 불자들이 나서서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하겠는가! 정답은 없다. 우리가 옳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이해가 다른 쪽은 틀렸다고 할 것이며, 또 다른 이는 과도기 이니 놔두면 세월이 다 해결해준다고 한다. 
곧 해결의 정답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는 지도자 대로 중도를 걷고, 재가불자는 불자대로 중도를 걸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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