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철한 민족주의자로 계몽운동에 앞장선 의로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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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철한 민족주의자로 계몽운동에 앞장선 의로운 분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08.2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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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6> - 하원 법화사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조명철 전 혜향문학회 회장이 중문중학교 재학시절 역사를 가르치던 스승으로서 원문상 스님을 회상하고 있다.

 

 원문상 스님, 중문중 설립자로 예비검속에 죽음 내몰려
‘조선불교혁신 제주불교승려대회’부의장, 불교혁신 주도

 

해방공간의 지식승이자 교육자로 잘 알려진 만허 원문상(滿虛 文常, 1908~1950) 스님은 교육계와 불교계 원로이신 조명철(85) 前 혜향문학회 회장의 70평생 불심의 뿌리가 되어준 큰 스승이다. 
스님은 1945년 12월 관음사 제주읍내 포교당인 대각사에서 열린 ‘조선불교혁신 제주불교승려대회’의 부의장을 맡아 불교혁신을 주도한다. 1947년 고향인 하원으로 돌아와 중문중학원에서 역사와 한문, 동양사 등을 가르치며 교육자의 길을 걷다가 1948년 당시 중문중학원 1학년으로 입학한 조명철 회장과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14살 무렵 청소년 시기에 조 회장의 눈에 비친 원문상 스님은 스님이 아닌 교사였다. 원 스님은 왜소했지만 박식함에 게다가 막힘없는 언변과 열정의 에너지까지 갖춘 분으로 기억했다. 
“원문상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스승으로 유명했어요. 우리에겐 역사를 가르치셨는데 책을 보지 않고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꿰뚫고 계신 분이었죠. 특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일방통행이 아닌 소통을 하셨지요. 늘 역사가 아닌 인생의 이야기든, 종교이야기든 늘 질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키에 똘똘했던 조 회장을 스님은 애제자로 아끼셨던 모양이다. 하루는 오전 수업을 끝마친 후 함께 갈 곳이 있다며 법화사로 향했다.
“그날이 부처님오신날이었던 것 같아요. 법화사에 도착하니, 대웅전 중심에 긴 기둥을 세워놓고 운동회할 때 다양한 국기를 걸어놓듯 그렇게 많은 국기가 걸려있고, 주변에는 등들도 많았지요. 당시 법화사에는 서귀포에서 안덕면 사람들까지 신도였으니까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어요. 선생님이 요사채에서 나오시더니 가사장삼을 하고 나오시는 거라. ‘아! 선생님이 스님이셨구나’라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중문중학교는 번듯한 학교 건물이 아니라 중문 향사를 빌려 중학원을 개원하게 된다.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선생님이 중심으로 건립되었고, 학교장은 이성주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1948년 4·3이 발발하면서 이성주 선생이 육지로 피신하면서 이경주 선생 중심으로 운영이 되었다. 하지만 4·3의 발발로 무장대에 의해 향사가 불타면서 중문 마을 창고에서 2학년이, 중문 예배당에선 1학년이 수업을 겨우 연명한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시 중문에 주둔했던 서봉오 중위가 남부일 소령에게 중문중학교를 새롭게 신축해 달라는 제안을 했어요. 주민들과 군인들이 삼나무를 베어서 군인 트럭으로 운반을 하면 학생들이 밤새 나무를 지키곤 했죠. 그 당시는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해서 귀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셨습니다.”
중문중학원은 처음에는 중학원 인가 학교였으나 제주 4·3 서귀포지역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전부일 소령이 배려로 인근 삼나무를 벌목해서 학교를 다시 세웠는데 그 고마움의 뜻을 전하고자 소령의 가운데 ‘부’자와 중문의 ‘문’자를 따서 ‘부문중학교’로 개칭한다. 1950년 4월 정부인가 정식학교로 인정받는다.
“당시 중문에 주둔했던 서봉오 중위가 남부일 소령에게 중문중학교를 새롭게 신축해 달라는 제안을 했어요. 주민들과 군인들이 삼나무를 베어서 군인 트럭으로 운반을 하면 학생들이 밤새 나무를 지키곤 했죠. 그 당시는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해서 귀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셨습니다.”
하지만 교육자였던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선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예비검속으로 행방불명 된다. 스님은 당시 승단에서도 개혁적인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당시 지식인층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 때는 막스-레닌주의에 물들지 않은 지식인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만허 원문상 스님


당시 부문중학교에는 서북청년단 출신 인물이 교감으로 부임했고, 설립자인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선생과의 마찰은 뻔했다. 1950년 8월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선생은 4·3 가담혐의가 덧씌워져 군경에 체포됐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이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1950년 7월 서귀포경찰서 ‘공무원 구속자 명부’에 의하면 원문상 스님은 ‘좌익사상 극렬자’로 기록되어 있었고, 이경주 교사의 경우 ‘망원경을 소지해서 산사람하고 연락했다’는 기록이 되어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지역민들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의로운 분이라고 기억되고 있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법화사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 말사이다.
제주4.3사건 시기 법화사는 소개령으로 법당과 요사채를 비우고 부처님을 모시고 하원 마을 안으로 들어가 초가로 절을 짓고 살았다. 장한택 스님은 하원 마을 성안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한글과 주산을 가르치는 문맹퇴치운동을 하였다. 아이들은 법당에서 연극연습을 하여 마을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 소개령 이후 토벌대에 의해 법화사는 전소되었고 1950년 3월 장한택 스님이 허술하게나마 복원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법화사는 장한택 스님이 드나들며 관리하였다.
1952년 한국전쟁 시기 법화사는 육군 제3숙영지로 사용되었다. 대웅전을 숙영지 본부로 사용하였고 법화사 경내 논을 메꾸어 연병장으로 사용하였다. 경내에 사병 막사가 지어졌고 법화사 위 지경은 군인들의 사격 훈련 등의 훈련 장소로 활용되었다. 
당시 숙영지 소장의 어머니가 불자라서 대웅전을 군인들이 쓰는 것을 보고, 새 대웅전을 지어놓아야 한다고 하여 소장이 장한택 스님을 찾아 새 대웅전 자리를 물색하게 했다. 장한택 스님과 신도회장 등이 모여 새로운 위치를 선정하여 기반 공사를 군인들과 함께 시작하였다. 기반 공사를 하던 중 소장이 떠나고 다른 사람이 부임하면서 재건은 지지부진해졌다. 후일 장한택 스님과 신도들이 법당과 요사를 다시 재건하였다. 원래 법당과 요사채는 현재 경내 법화수 지경에 있었다. 새로 재건된 법당은 현 대웅전 자리이다. 그 법당을 허물고 1987년 다시 현재의 대웅전을 지었다. 현재의 구품연지는 연병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1951년 1.4후퇴 이후 전쟁이 격화되며 대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가 1951년 1월 22일 제주도 모슬포로 이동 설치되었다. 전투가 격화됨에 따라 하루에 500명 정도 입소하던 군인들이 8만 명 정도가 입소하기도 하였다. 제주도의 제1훈련소에서만 1951년부터 1956년 1월까지 50만여 명의 신병이 배출되었다. 이 시기인 1952년 2월 13일에 법화사에 제3숙영지가 설치된 것이다. 숙영지는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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