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만은 아무 걱정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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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만은 아무 걱정 없지 않습니까?”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9.0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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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얼마만큼 잘 살고 있는가요? 법정 스님이 하안거 해제 법문으로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새롭게 짚어주셨습니다. 지나간 것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갖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영혼을 맑게 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재가불자들 역시 좌선을 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날마다 좋은 날을 맞이 할 수 있다는 것이죠. <편집자주>

 

 

더위 속에 잘들 지내셨습니까? 왜 더위가 오지요? 고온다습해야 벼농사가 됩니다. 고온다습하지 않고는 우리가 쌀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더위는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우주가 베푸는 일종의 은혜와 선물입니다. 
모든 것은 순간이고 찰나입니다. 머지않아서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산에는 요사이 노란 좁쌀 같은 마타리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마타리꽃이 피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옵니다. 
오늘이 여름안거 해제일입니다. 지난 90일 동안 나 자신이 수행자로서 혹은 불자로서 어떤 업을 쌓으며 살아왔는지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나이가 한 살 더 축적될 만큼 제대로 삶의 시간을 보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당나라 말엽의 스님으로 운문 선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까지 살다 간 분입니다. <운문록>이라는 어록도 전해지고, 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끼친 큰스님입니다. 이 분이 오늘 같은 보름날 법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5일 이전의 일은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에 대해 한마디 해보라.”
이미 지나간 과거사는 그만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대중들 사이에서 아무 말이 없자 스님 스스로 대신 답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좋은 날이란 귀합니다. 또 좋은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그 좋은 날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혹시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그 나름의 까닭이 다 있을 것입니다. 세상사는 모두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 의미를 알게 되면 한 생각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불행한 날이 불행하지 않은 날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주 안에서 천막 아래서, 또 법당에 앉아서 지금 현재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는 가난함과 부유함, 사랑과 미움, 좋음과 싫음, 많음과 적음에 대한 근심 걱정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 분별 없이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렇게 앉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호흡에 달린 일입니다.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들이마시지 못하면 몸이 굳어져 버립니다. 매순간 우리가 숨을 쉬면서 산다는 것은 아주 귀중한 일입니다. 무심히 지나치고 말 일이 아닙니다. 일찍이 우리와 같이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은 이 숨을 제대로 못 쉬어서 지금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순간순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걱정 근심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그 순간보다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해서, 또는 아직 오지 않은 일에 생각이 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아무 걱정 근심이 없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언제 어디서나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충만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좌선은 선방에서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좌선은 모든 불교도의 기본 자세입니다. 부처님의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모든 불자들의 기본적인 수행입니다. 
좌선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한 수행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커다란 환희의 법문입니다. 아무 잡념 없이 우리가 부처님처럼 앉아 있는 이 자체가 커다란 대안락의 법문입니다. 때 묻지 않은 청정법신의 모습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좌선을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애써서 수행을 하는가? 본래의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닦지 않으면 오염되기 때문에, 성장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물들기 때문입니다. 
지난여름, 제게 있어 가장 보람되고 즐거웠던 시간을 꼽으라면, 아침저녁으로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묵묵히 앉아 있던 그 시간입니다. 책 읽고 밖에 나가서 일하는 시간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개울물 소리에 귀를 맡기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가 가장 기쁜 시간입니다. 이것을 선열위식禪悅爲食이라고 하는데, 선의 기쁨으로 밥을 삼는다는 뜻입니다. 불자들은 그런 수행을 꼭 안거 기간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교 수행자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런 자기 충전을 통해 이 험난한 세상을 무난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만일 자기 충전 시간이 없다면 늘 중생 놀음, 여기에 팔리고 저기에 휩쓸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 충전의 시간은 곧 자기 중심의 시간입니다.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을 될 수 있으면 많이 가져야 합니다. 
신문에서는 몇억이 있어야 노후 대책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는 말들을 합니다. 이런 숫자에 속지 마십시오. 순간에 사는 사람에게는 노후 대책이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삶은 숫자 놀음이 아닙니다. 자기 중심이 없고 자기 탐구가 없는 사람들은 늘 그런 것에 정신을 빼앗긴 채 살고 있습니다. 그 순간을 살 줄 안다면 많은 돈이 없어도 노후를 제대로 보낼 수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해결될 것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럼 돈 많은 사람들은 죽지 않아야 하는데, 이들도 어김없이 죽습니다. 
행복의 문제는 소유와 밀착되지 않습니다. 네팔 히말라야 산동네에 가 보면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난하게 삽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눈빛을 보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토록 친절하고 활기차고 건강하고 밝게 삽니다. 네팔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걱정해야 할 일은 경제수치가 아니라 점점 전락해 가는 인간성입니다. 
황폐화된 인간은 많이 가질수록 더 해롭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타인과 환경에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모자라고 아쉬운 부분을 채우려고만 할 게 아니라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조촐하고 사소한 것으로도 얼마든지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안빈낙도 정신이 있지 않습니까? 넉넉하지 못한 생활환경에서도 찌들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는 인생관, 이것이 우리 선인들이 지닌 처세훈입니다. 
노후에 대한 불안을 미리 가불해서 쓰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맑은 정신을 지니고 관조하면서 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롭고 조촐한 노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일야현자경>에서 이렇게 법문합니다. 
“어느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겠는가. 진실로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를 바로 알아차린 사람은 낮과 밤에 한결같이 정진하나니 이런 사람이 하룻밤의 현자이다. 또한 고요함에 이른 사람이다.”
또 같은 경전에서 부처님은 말합니다. 
“과거를 따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있을 때 그의 안색은 생기에 빛난다. 분수 바깥 것을 탐내어 구하고 지나간 과거사를 슬퍼할 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꺾인 갈대처럼 시든다.”
날마다 좋은 날 이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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