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에서 봉림사까지…마르지 않는‘원샘’이 원천
상태바
용주사에서 봉림사까지…마르지 않는‘원샘’이 원천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09.05 14: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7> -호근동 봉림사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1929년 최혜봉 스님 창건, 4·3이 발발 회오리 몰아쳐
민가 전전하면서도 신도들의 불심으로 제2 창건 원력
 

 

오춘길 봉림사 도화주 보살님

서귀포시 호근동 봉림사(주지 일경 스님)는 하논 분화구 내 중턱에 위치한 사찰이다. 하논은 ‘많다’의 제주어로 큰 논, 넓은 논을 의미한다. 밭농사가 주를 이뤘던 제주에서 사계절 마르지 않는 논에서 쌀농사를 짓던 곳이다. 
그 물줄기가 바로 봉림사 일대에서 흐르는 속칭 ‘원샘동네’라 불리는 물이다. 봉림사 대웅전과 감로당 사이에 맑은 용천수가 흐르는데 그 맛이 감로수나 진배없다. 주민들은 ‘무슨 일이든 정성을 다할 때만 물이 넘친다’고 얘기할 정도로 이 용천수는 신성시 되고 있다.
그렇게 ‘원샘’이 솟아나던 터에 지난 1929년 최혜봉 스님에 의해 용주사(龍珠寺)라는 사명으로 창건됐다. 
당시 혜봉 스님이 이곳에 창건 원력을 세우자 김복남 거사가 절터 1660㎡(473평)을 시주한 것이 불법 홍포의 시초라고 한다.
혜봉 스님은 지난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 당시 용주사 대표로 참여하는 등 교무회원으로 활동했을 정도로 왜색불교 타파에 앞장섰던 스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1948년 4·3이 발발하면서 용주사 역시 그 회오리에서 빗겨나지 못한다. 전각은 그 해 11월 토벌대에 의해 전소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속 건물과 불기 역시 그 후 잿더미가 됐다. 당시 스님은 불상과 탱화 등을 지고 남의 집을 빌려 임시 거처로 사용하다 1953년 초가 법당과 요사채를 재건했다고 전해진다.
올해 97세의 연세지만 이를 오롯이 기억하는 오춘길 봉림사 도화주를 만난 건 커다란 행운이었다.
“최혜봉 스님은 육지 분이셨는데 당시에도 주석을 하고 계셨어요. 육지에 친척이 있어 볼일을 보러 나가셨다가 그만 4·3이 터지고 만 겁니다. 그래서 스님은 그 이후로 뵐 수가 없었어요. 그 이후로 오래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어요.”
봉림사는 4·3으로 전소되면서 불상을 호근리 이장님 댁으로 이운을 한다. 가마에 곱게 모시고 부처님을 이운하던 중, 비탈길을 오르다가 그만 부처님이 가마에서 떨어져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그로인해 부처님의 이마에 상처가 생겨, 제대로 모실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 자리에서 신도들은 땅을 파서 부처님을 안장해 드린다. 
이처럼 불상사에 염불을 집전할 스님도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사찰로서의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신도들이 집안의 일이 있거나 재를 지낼 경우만 인근 사찰의 스님을 모셔서 재를 지내며 명맥만 유지해 나간다.  
이 같은 현실에 안타까움을 가진 신도들이 마음을 모아 호근리 동산에 빌어 인법당을 짓는다. 3년 동안 신도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물이 귀했던 시절이다. 그러던 중 4·3이 평정이 되었고, 용천수가 흐르던 옛 터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도들의 의견에 따라 현재의 터로 이전하게 된다. 

봉림사 전경


그러다 지난 1968년 주지로 부임한 혜공 스님이 용주사를 황림사(潢林寺)로 개명하면서 대웅전을 중수했다. 이후 1983년 제주시 삼양동 불탑사에 적을 두었던 일경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사찰명을 봉림사(鳳林寺)로 다시 변경했다.
일경 스님은 “현재 감로당(요사채)이 자리잡은 곳에 당시 대웅전이 들어서 있었다”면서 “당시 대웅전은 슬레이트 지붕이어서 여름철이면 화탕지옥(火湯地獄)이나 다름없었고, 장마철이면 비가 새는 등 부처님을 모실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스님은 그 후 여법한 법당 조성을 위한 원력을 세우게 된다. 시주금과 기도비를 한푼 두푼 모아 인근 부지를 매입하는 등 10년의 각고 끝에 지난 1994년 대웅전을 완공했다.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협시불로 관세음․대세지보살이 봉안돼 있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봉림사

봉림사는 서귀포시 호근동,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 말사이다.
1929년 최혜봉스님이 용주사로 창건하였다. 호근동 하논 분화구의 높은 언덕 지경에 있다. 최혜봉 스님은 1945년 12월 해방이 되면서 왜색 불교를 반성하고 새로운 불교활동을 모색하기 위한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 참석하였고 교무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하논은 16여 가호가 살던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 19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주민 한 명이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토벌대가 소개령으로 마을을 모두 비우게 하였고 마을 전체가 소각되었다. 소개령은 더 이상 마을을 근거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목적이었으므로 가옥을 불사르는 것이 함께 진행되었다. 제주4.3사건 이후에도 주민들은 하논으로 돌아가지 못하였고 하논은 제주4.3사건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 표석이 건립되어 있다.
용주사도 하논 마을과 함께 1948년 11월 19일 18평 정도의 초가 법당과 요사가 모두 마을과 함께 불질러졌다. 석자 크기의 석가모니 불상과 칠성탱화 등을 업고 지고 나왔다. 호근동 마을 큰영구장 지경의 남의 집 밖거리를 빌려 임시 거처로 2년 가까이 사용하였다. 돌아갈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던 시절이라 호근동 옆 서호동 박애작동산 인근의 밭을 빌려 16평 정도의 인법당을 짓고 3년 정도 머물렀다. 그 사이 상단탱화 신중탱화 산신탱화 영단탱화 등이 훼손되어 버렸고, 토불이었던 불상은 옮겨다니던 중 훼손되어 매불하였다.
1953년 용주사 터로 돌아와 신도들이 용주사 재건을 위해 힘썼다. 홍리에서 집을 하나 사다가 법당을 지었다. 기존 건물의 불타고 남은 석재 등은 뜯어서 조왕단을 지었다. 스님을 구할 수 없어 신도회가 주관이 되어 인법당으로 복원하였다. 신도들이 흙질을 하며 초가집을 지었다. 20평의 초가 법당과 15평의 요사로 복원하였다. 
 용주사는 1968년 대웅전을 중건하여 황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83년 다시 봉림사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대웅전은 1994년에 완공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