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섬부주(南贍浮洲) - 불자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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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섬부주(南贍浮洲) - 불자의 가을
  • 보문 이도현 객원기자
  • 승인 2018.09.19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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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 이도현 <본지 객원기자>

111년 만의 더위로 근육세포, 마음세포까지 무기력증을 경험하게 했던 염치없는 여름이 떠날 채비를 끝냈고, 이제 한 치의 어김도 없이 돌아온 가을빛, 가을향기가 시나브로 스며들며 제주의 들녘을 채우고 있다. 
따사로운 햇빛을 담은 한줄기 가을바람의 속삭임에 응답이나 하듯이 제주의 곳곳에서는 억새꽃의 은빛 춤사위가 영글어가는 가을의 정취에 흥을 더해 주는 듯 하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며 환희의 계절, 풍요의 계절, 회향의 계절이다. 가을은 왜 없이 결실을 맺고 기쁨을 주며, 풍요로움을 이루어 모든 것을 모두에게 돌이켜 향하게 한다. 그래서 가을 들판은 텅 비어 있되 넉넉하여 허전하지 않으며, 쓸쓸하되 여유로와 외롭지 않다. 흔히들 이를 일러 “텅 빈 충만” 이라 한다. 
가을은 남부지방에서 쓰는 사투리인 “갖다”를 어원으로 하는 말이다.  추수하다는 의미를 지닌 방언 ‘갖다’가 가슬 - 가을로 변하여 오늘날 쓰이고 있는 것으로, 가을은 “거두어들이다”는 뜻을 가진 계절 명칭이다. 
하늘이 불타는 것 같은 뜨거운 여름철의 무더위와 비바람을 참고 견디며 인내의 시간을 보낸 뒤 그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시절이 곧 가을인 것이다. 
거두어들인다는 뜻을 가진 가을은 우리 불자에게도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말이다. 입의 침묵, 몸의 침묵, 마음의 침묵을 통해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들여서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 스스로를 관조함으로서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힘을 기르는 시간을 갖는 것이 가을을 보는 불자의 눈이 아닌가 싶다. 오로지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시선을 두고 끄달리며 살아온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텅 빈 들녘의 넉넉함에 비추어 보는 일은 가을이 들려주는 법문이다.
“나의 말만을 가지고 법문이라 하지 말라. 바람소리 물소리 그리고 낙옆 구르는 소리도 모두 법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하신 말씀이다. 
별빛을 품고 달빛을 담은 산사에서 마음의 달을 밝혀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찾고자 하는 자신을 보는 것도 좋고, 유유히 흘러가는 한 조각 흰 구름을 보며 걸림 없는 삶과 진흙 속의 연꽃처럼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삶을 꿈꾸어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다 주어도 남음이 넘치는 들녘을 바라보며 구하고 채우기 보다는 버리고 비워서 가벼워지고 오염되지 않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일이고,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가을의 본래모습을 보며 편협하고 보잘 것 없는 지식과 견해로 치장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닌가.
무상(無常)나그네의 발걸음에서 새로운 시작의 씨앗을 보는 이 모든 것들은  거두어들일 줄 아는 불자들의 안목에서 가능한 일들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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