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일기-금산사 팔재계 수계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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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일기-금산사 팔재계 수계법회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9.1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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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각(21기 포교사)

‘황금빛 산사’ 라고 불리는 금산사에 들어서니 전북포교사단 거사님과 보살님들이 안내를 하며 반겨 주신다. 법당으로 향한 깊숙한 숲길에는 여러 가지 나무들이 이름표를 달고 늘어서 있다. 
고욤나무, 꽃사과나무, 소사나무...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각자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고욤나무는 옆에 있는 꽃사과 나무처럼 열매(사과)를 맺으려 나서지 않는다. 씁쓸한 마음으로 ‘해탈교’를 건너 법회장으로 들어갔다. 앞쪽에 자리한 제주포교사단에 자리를 하고, 보살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서귀포 보살의 안색이 좋지 않다. 아마도 혈이 막힌 듯 하였다. 옆에 있는 보살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응급처치를 했다. 손가락을 따며, 기가 통하여 우리들의 막혔던 가슴까지도 뻥 뚫리기를 바랐다.
매년 팔관재계를 앞두고 ‘사경지’를 배부 받았다.
하루하루 준비하는 마음으로 써 나갔고, 수계 법회시 상단에 올리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포교사단에서 사경지 준비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새로 일반포교사 품수를 받는 분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경지 안에는 팔계에 대해서도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진행이 매끄럽지 않다. 진행자가 입정을 하자고 해놓고 무언가 문제가 있는지 마이크에 대고 딴소리를 한다. 입정에 들어갔는데 뒤에서 보살님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입정이나 풀어놓고 하든지..”순간 종단의 상황과 맞물려 받아들여진다. 가정의 아버지가 제 역할을 못하면 자녀들도 갈등을 겪듯이...
다행히 포교부장 가섭스님의 특강이 시작되었다. 스님께서는 “오늘 시작하기 전에 가사를 벗고 대중들에게 참회의 절을 하고 싶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우리 가슴속에 응어리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스님께서는 이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다”고 하시며 “종단의 문제로 내 마음 속에 법(法)의 생명을 해치지 말자!”고 부탁하셨다.
“법의 생명은 삼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마음에 법의 생명을 훼손하지 말고 잘 지켜나가자.”
8재계 中에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되어있는데, 생명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육체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이다. 우리가 팔관재계를 반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법의 생명을 점검하는 것이다. 법의 생명이 약하거나 끊어졌을 경우 다시 움틔우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심·원력을 거듭거듭 냄으로써 자신을 점검하고, 法의 생명을 점검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현장에서 보면 포교사가 어렵다. 오늘 신임포교사들을 보며, 25년 전 사미계를 받을 때가 생각난다. 통도사에서 사미계를 받으며 가슴이 뭉클하고, 콧잔등이 짠해졌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옆에 있는 도반스님도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의 의미는 법의 눈물, 법륜으로 마음이 채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님은 더불어 원력·법력도 그와 같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모두가 처음 포교사복을 입었을 때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있다. 불자·전법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마음속 법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지키는 원칙은 3계5계를 잘 지키는 것이나 그것이 무너지면 원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불·법·승은 5계 계율을 잘 지킴에 있으나 우리는 육신의 욕망에 더 큰 마음을 쓴다. 육신의 생명보다 법의 생명에 더 힘써야 하겠다. 왜냐하면 법의 생명을 해치면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법의 생명을 지키는 전법자로 거듭나야 한다. 화엄경을 평생 공부한 스님을 두자로 줄이면 ‘생귀’라 한다. 그것은 법의 생명으로 귀의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할 때 욕망에 사로잡혀 산다. 법의 생명으로 귀의하는 것이 우리마음에 부처를 피워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법의 생명을 키울 것인가?’ 그것은 바로 <삼보>를 바로보고 지켜나가는 것이다.”
스님께서는 포교사들에게 감사를 전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의 말씀은 ‘새롭게 거듭나고 중흥하는 길은 <전법>이라는 감수성을 깨우는 것’이라고 하셨다. 감수성이란 깨어있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 법을 전하려고 마음을 내어야 하고, 포교사로서의 역할을 잘 하여 전법사의 역할을 하는 ‘창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스님의 말씀이 끝나고 우리의 마음도 한층 숙연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어른들이 잘못한다고 해서 우리들까지 ‘부화뇌동’ 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감은 참으로 간사하여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구업(口業)을 지어가면서도 풀어야 하는 모양이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잘 못한다고 해서 남들과 함께 장단을 맞추어 부모 욕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분위기가 숙연해진 가운데 품수식을 진행할 수 있었다. 새내기 포교사들은 서늘한 공기 속에서도 단복을 입지 못하고 대기 중이었다.
단복수여식이 끝나고 대표포교사가 단복입식을 하자 모두가 그제서야 단복을 착용할 수 있었다. 포교사증 수여가 있었고, <전도 포교문>이 낭독되었다.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들을 위해···두 사람이 함께 가지말고, 혼자서 가라!···’
금산사는 진표 율사께서 불사하신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자장 율사께서 통도사 금강계단을 조성하신 것과 같다. 8관재계라는 것은 ‘잘못을 금하고 막는다는 것’이다. 계를 받음으로써 계체(戒體)를 형성하는 것이다. ‘계’(械)는 받는 것보다 지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킴으로 해서 <스스로 청정하고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내 자신이 편안해지면 주변의 다른 이들도 더불어 행복해 한다.
8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으로 6가지(육념법)를 지켜나가야 한다. <반야지혜>를 닦아야 부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포교를 한다는 것은 단지 불교가 퍼지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유념의 법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수행, 즉 육념법 수행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염불(念佛)은 부처님 존재를 생각하고, 항상 잊지 말기를 당부하는 것이고, 염법(念法)은 부처님의 진리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곧 반야지혜인 것이다.
염승(念僧)은 부처님의 제자인 스님을 생각하여 잊지 않기를, 염계(念戒)는 부처님의 계율을 항상 생각하고 지키기를, 염시(念施)는 세상 사람에게 보시를, 나눔을 생각하고 베풂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혼자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서로 관계를 통해 공존한다.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다. 공존하기 위해서 5계를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염천(炎天)은 하늘의 청정함을, 천상의 맑고 밝음을 생각할 것이다. 계행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깨끗함을 생각할 것이다.
결국 5계와 3계는 음주와 사치를 하지 말고, ‘퇴폐적이고 권위적 생각으로 남들을 얕잡아보지 말라!’는 것이다.
일주문을 나서는데 새벽 5시 반 알람이 울린다. 뒤에 내려오는 보살님의 “어디래요?”라는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가 귀에 들어온다. 새삼 전국의 모든 포교사들이 각지에서 힘써 참석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전법자로 부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잘 감당해 나가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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