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룡사 역사 속에 4.3은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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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룡사 역사 속에 4.3은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09.1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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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9> -도평동 흥룡사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4.3사건 당시 주지스님이 총살당한 흥룡사 전경

 

당시 주지 백삼만 스님, 1949년 1일 토평서 총살
흥룡사 대화주 흥순여 보살, 엉덩이에 총탄 자국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기도 영험의 깃든 기도처로 유명했던 제주시 도평동 용장굴(현 흥룡사). 홍순여(복덕행, 1929년 생, 90세) 흥룡사 대화주의 증언에 따르면 4․3광기로 피비린내 진동하던 1949년 1월 용장굴의 주지 백삼만(속명 백인수) 스님은 이른 아침 공양을 마치고 포행을 할 무렵, 허름한 갈옷을 입은 무리가 도량 안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이어 인근 외도지서에서 경찰들이 들이 닥쳤는데 이는 토벌대가 주민들에게 함정을 판 것이었다. 
주민들이 모이자 군인들은 기관총을 설치하고 주민들을 향해 사격을 했는데 백삼만 스님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백삼만 스님은 그 후 3개월 후에 시신이 수습됐는데 그 안에는 총탄이 그대로 몸 안에 박혀 있었다고 한다. 이미 군인들은 마을에 불 지르고 용장굴로 다시 쳐들어와 건물 일체를 전소시켰다고 한다.

흥룡사 대화주 홍순여 보살

토벌대에 의해 스님이 총살되고 용장사는 폐허를 맞는다. 4․3의 상처는 남겨진 자들에게 대물림됐다. 백삼만 스님의 아들인 백금남 씨는 당시 두 살배기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부산 영도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이 될 무렵 어머니가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털어 놓는다. 그때야 백 씨는 아버지가 스님이셨던 것을 알았다. 그리고 4·3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너를 키워냈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을 잘 키워보겠다는 일념으로 갖은 고생을 하시다 백 씨가 21살 때 돌아가신다. 
이 세상 홀로 남은 백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습작으로 익혀온 글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낮에는 막노동으로 심신이 피곤함을 물리치고 밤에는 가로등 등불아래 몽당연필로 자신의 작품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내공을 키웠던 백 씨는 지난 1985년 제15회 삼성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1989년에는 백 씨를 세상에 알린 ‘십우도’를 발표하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유명해지고 평생 이름도 얼굴도 듣지 못했던 한 살 위의 누이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40년 만의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백 작가는 누이를 통해 어렴풋하게 아버지를 느끼게 됐다. 
“누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몸에 총알이 그대로 박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처음 해 줬죠. 그 때야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정확하게 알았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그림과 조각에 뛰어나셨다고 하는데 그 예술적 피가 제가 불교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것이 아닌가 싶더군요.”
잿더미가 된 용장사 터를 다시 일으킨 것이 바로 1952년 능허당 덕종 화상이다. 이때 사명을 흥룡사로 개명하게 된다. 이후 1972년 대웅전을 중건했으나 아쉽게도 스님은 세수 45세로 열반에 들게 된다. 그 후 홍순여 보살이 불사를 계승했으나 1987년 다시 화재로 사찰이 전소되고 만다. 한동안 시름에 젖어있던 홍순여 보살은 부처님을 위한 여법한 도량 조성의 초심을 다시 상기하며 2년 뒤인 1989년 지금의 장엄한 대웅보전을 완공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흥룡사를 여법하게 조성한 홍순여 보살에게도 4·3은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악몽과도 같다. 동네 삼촌의 부탁으로 종이를 나눠주러 갔다가 화를 당한다. 그 종이가 산사람들이 전해준 삐라였다. 결국 빨갱이로 몰려 토벌대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용장굴에 숨어들었다가 발각되어 집단학살터로 끌려가게 된다.
“포승줄에 묶여 길게 줄지어 끌려가는데 제가 스웨터 닮은 옷을 입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포승줄이 느슨하게 묶여 있음을 느끼고, ‘여기서 죽으나, 그곳에 가서 죽으나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에 뒤에 오는 사람하고 같이 탈출하자고 마음먹었죠. 때마침 바람이 강하게 불었는데 스웨터가 펄럭여서 살았어요. 군인이 쏜 총탄이 가슴에 맞지 않고 다행히 엉덩이를 관통했던 겁니다.”
겨우 돼지우리나 쇠막 등을 전전하며 치료한 끝에 목숨만은 연명했다는 홍순여 보살. 아직도 4·3피해자 등록을 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삶 속에서 4·3을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흥룡사

제주시 도평동 한국불교태고종 제주교구 사찰이다. 
흥룡사는 1933년 김영선스님이 위봉사 제주도 도평포교소로 설립인가를 받았던 용장사이다. 1943년 백양사 포교소로 변경 신고했다. 1941년 백인수 스님이 부임했다. 백인수 스님은 1945년 말 제주도불교청년단대회 선전부장을 역임하였고,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 교무회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한다. 제주4.3사건으로 1949년 1월 3일 백인수 스님은 도평국민학교에서 총살당하였다. 
도평리는 제주4.3사건 시기 토벌대의 비인간적인 함정 토벌이 있었던 곳이다. 1949년 1월 3일 외도지서 경찰과 군인이 무장대로 가장하고 주민들에게 산에 협조할 것을 종용하였다. 토벌대가 무장대 협조 세력을 찾아내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러나 안면이 있던 경찰 등이 위장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본 주민들이 있어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일부 주민들은 눈치를 채고 대한민국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토벌대는 결국 주민들을 도평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도피자 가족들을 지명하게 하여 선별한 후 총살하여 인간성을 말살하는 행위를 자행하였다. 청년들은 외도지서로 연행하여 총살했다. 주민 70명 가량이 총살되었다. 
토벌대는 도평리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소개를 명령했다. 이미 소개하고 있던 사라마을 주민들은 다시 한번 외도 등지로 소개 당했다. 토벌대는 도평동의 모든 마을을 불 질렀다. 도평동은 상동, 하동, 사라마을, 창오랭이, 왯뱅디, 짐수모루 등 6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용장사 주지 백인수 스님은 흰 누비 장삼에 붉은 가사를 입고 도평초등학교 운동장에 집합하였다.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하였다. 백인수 스님도 도평국민학교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3개월여 후에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토벌대는 도평 마을에 불을 질렀고 도평리 사라마을에 있던 서관음사 쪽에서부터 불길이 솟아올랐고 이어 용장사까지 불 질렀다. 용장사 초가 법당과 요사 등 건물 일체가 전소되었다. 이에 따라 불상과 탱화 등의 집기도 모두 소각되었다.
용장사는 1952년 김남수 스님이 초가 법당으로 재건하고 흥룡사로 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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