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크 스투파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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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크 스투파 앞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9.1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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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고행 - 인도 불교 성지를 중심으로 ③ /오영호 시인

오영호 시인의 인도불교성지순례기 그 세 번째 이야기다. 오영호 시인 일행은 디메크 수투파에서 금강경을 읽으면서 남다른 감동을 얻는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부처님의 진리와 만나는 또다른 감동과 만나게 된다. <편집자주>

 

법으로 폐지됐지만 현실에선 여전히 존재하는 카스트제도가 인도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한다.

 

목탁에 맞춰 낭랑하게 퍼지는 경읽는 소리는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보리수나무를 흔든다

조금 들어가니 대탑 디메크 스투바(주로 흙과 벽돌을 이용하여 만든 탑으로 존경 받던 고승의 유골을 보관하는 곳) 앞에 섰다. 법안보탑(法眼宝塔)이라고도 한다. 디메크란 ‘진리를 관(觀)한다’는 뜻이다. 이 대탑은 높이가 34m 아랫부분 직경이 26m 아래로부터 13m는 석조로 둘러져 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과 당초문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윗부분은 직경이 줄어들면서 붉은 벽돌로 쌓아 있다. 
일행은 탑 앞에 모여 앉았다. 혜전 스님과 경수 스님 집전으로 법회가 시작되었다. 금강경을 독송한다. 가슴이 뭉클하다. 여기가 어딘가. 아, 이곳 녹야원 풀밭에 앉아 법회에 동참하다니... 만감이 교차한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다. 땀이 줄줄 흐르지만 아랑곳 하지 않는다. 환희에 찬 보살들의 진지한 표정은 참으로 경이롭고 숭고한 모습이다. 
불현듯 오래 전 여름 방학 때 성철 스님이 계신 해인사 백련암을 찾았던 일이 떠오른다. 산길을 한참 걸어 절문을 들어서니 죽비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오른 쪽에 있는 법당 쪽으로 가 보았다. 법당 안에는 법복을 입은 신도들이 죽비소리에 맞춰 절을 하고 있었다. 윗옷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 때 신심이 돈독한 보살들의 참된 모습을 보았다. 불심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선체로 법당을 향해 삼배를 하고 그냥 내려오고 말았다. 지금 대탑 앞에 가지런히 앉아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는 보살들의 모습 또한 그러하다. 목탁소리에 맞춰 낭랑하게 퍼지는 경 읽는 소리는 녹야원을 돌아 이곳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보리수나무를 흔든다. 그러자 이파리들이 일제히 반짝거린다. 이 때 푸른 바람이 건 듯 지나가고, 나의 번뇌 망상도 어느새 새들이 쪼아 물고 어디론지 날아간다. 울타리에 핀 꽃들도 더욱 아름답고 향기롭다. 왜일까? 녹야원의 경이로움 때문일까. 금강경독송이 끝나자 모두 일어서서 합장한다. 경건함 그 자체다. 혜전 스님이 발원문을 읽는다. 여기에 온 불자들의 절실한 염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메시지까지 담고 있다. 환희심이 절로 났다. 이런 일련의 모습을 지금껏 본 적이 없다. 탑돌이까지 했다. 찌는 더위 속에서도 모두들 얼굴색이 환하다. 보살다운 보살로 변해가는 환희심이 꽉 찬 모습이라고 할까. 그래서 성지순례를 오는 것이리라. 모두들 바라는 일들이 잘 풀리리라 믿는다. 탑과 정사 터를 다시 보며 녹야원을 나왔다.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다. 인구 80% 이상이 힌두교인이다. 그래서인지 마을 곳곳에 하얀 색을 칠한 힌두 사원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그래서 다양한 신의 모습을 한 조각상들을 볼 수 있다. 동물도 소 뿐 아니라 물고기, 뱀 등도 신들과 함께 등장하며 숭배의 대상이다. 불교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코끼리, 물고기 등이 나오는데 자이나교와 함께 힌두교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불교의 교리와 힌두교의 교리는 공통점이 많은데 방법은 다르지만 윤회와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모든 인간 안에는 불성이 있어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힌두교에는 카스트제도가 철저하며 브라만 이외의 자들은 수행을 통한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카스트끼리는 교류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불가촉천민은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가 타고 다니는 버스 기사와 보조기사의 대접도 그렇다. 버스에도 운전석과 관광객이 앉는 좌석 사이에 유리창으로 막혀 있다. 물론 드나드는 큰 유리문과 열어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조그만 창문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손님 석엔 에어컨 시설이 되어 있지만 운전석엔 없다. 그뿐인가. 호텔에 도착하여 식사를 할 때다. 운전수 및 보조 기사를 볼 수가 없어서 어디서 식사를 하느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다. 대답하길 운전수는 아예 호텔에 들어올 수가 없고, 식사도 자기네대로 해결하고, 잠도 버스에서 잘 것이라고 한다. 천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카스트 제도가 법적으로 폐지가 됐다고 하지만 실재로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인도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민생치안 불안, 종교에 너무 의존하는 생활, 빈부의 격차 등을 꼽고 있다. 때문에 많은 인구와 넓은 국토, 많은 자원 등이 풍부하지만 선진국 대열에 오를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너무 느리게 발전하고 있어 오래 걸릴 것 같다.   
언젠가 TV에서 몸에 한 올의 지푸라기도 걸치지 않은 수도승들이 개미 한 마리라도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하여 빗자루로 앞을 쓸며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자이나교 수도승 들이었다.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은 종교라고 한다. 마하비라는 부모가 죽은 후 출가하여 12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서 자이나교 교조가 되었다. 인도에서 하나의 종교로 성립된 이후 불교·힌두교와 더불어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의 전통적 문화와 그 유형·무형의 유산에 관해서 자이나교를 무시하고는 지금도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한다. 특히 불교와 교단간의 밀접한 교섭은 양종교의 원시 경전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인도의 스라바나벨라고라가 이들의 성지다. 이곳엔 18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땅을 대단히 많이 갖고 있어 부자들이 많다고 영혼은 순수한데도 속된 물질의 업에 속박되어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에 고행을 통해 본래의 되찾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소유, 불살생, 불간음, 채식주의, 세상 만물에 대한 관용, 다른 종교에 대해 무비판, 평화를 옹호한다. 불교와 비슷한 점은 인간은 자신의 업에 따라 윤회한다는 것과 스스로 자각하여 깨달음의 경지로 넘어서는 것 등이다. 차이점은 불교는 수행방법이 중도적인 반면에 자이나교는 극단적인 고행주의다. 또한 업(業)을 보는 데 자이나교는 물질적인 실체로 간주한다. 그러나 불교는 추상적으로 본다. 기회가 온다면 한 번 방문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힌두교에서 파생된 종교라고 한다. 그리고 힌두교는 많은 신들을 가진 교이며 인도의 토속종교와 브라만교의 결합으로 다양한 종교의식을 갖고 있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불법을 믿으며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브라만교나 힌두교는 신을 믿으며 제사와 의례를 중시하고 엄격한 카스트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고정적인 자아인 아트만을 인정한다. 때문에 브라만교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던 기원전 6세기 무렵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카스트제도를 극복하고자 하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탄생 등장하였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동시에 반(反)브라만교 운동에 앞장섰지만, 서로 화합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요인은 고행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불교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수행 방법들 중 최고라고 공인된 고행을 닦지 않고도 깨달음만으로도 해탈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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