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진 스님, 혁신적 사상 가졌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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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진 스님, 혁신적 사상 가졌던 인물”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10.0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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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10> - 서관음사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이세진 스님

이세진 스님은 1910년 8월 25일 제주도 한경면 저지리에서 출생하였다. 18세에 내장사에서 한고벽을 스승으로 출가하고 백양사에서 유금해를 계사(戒師)로 비구계를 받았다. 내장사 총무직을 역임했으며, 백양사에서 법계를 품수 받았다. 내장선원에서 약 3년간 강사로 활동하였고, 강원도 금강산 표훈사 중향강원 강사로 약 2년간 활동하였다. 중향강원은 불교경전과 함께 근대 신학문을 교육하는 개혁적인 전통강원이었다.
 1930년대 제주불교는 불교활동을 위한 불교단체를 구성해 내어 관음사 창건 이후 가장 왕성한 사찰의 증가와 전통불교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신앙 양상의 변화를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본사가 다른 사찰의 통합 활동을 제주불교 인물들이 주체적으로 이끌어 내는 등으로 제주불교가 활성화된 시기였다.
백양사 주지 송종헌 스님은 이세진 스님을 제주도로 보내었다. 1939년 2월 백양사 한림포교당 포교사로 부임하여, 1939년 제주불교연맹 교육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제주불교연맹은 1930년대 제주불교의 통합 활동을 이끌었던 단체로 제주도 전역의 순회강연을 주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세진 스님도 불교와 신앙 등을 주제로 함께 순회강연에 참여하였다. 
또한 1940년 관음사포교당인 대각사의 제주강원에서 근대 제주불교의 첫 강원교육을 실시하고 1941년 20여명에게 비구수계를 주었다. 이세진 스님은 도평리 서관음사에서 기와 공장을 운영하며 승가의 경제 독립과 전통강원 설립을 의도하기도 하였다. 
이세진 스님은 전통불교를 지키려는 임제종 운동을 했던 송종헌 스님과 백양사 활동을 하였고 신학문을 교육한 중향강원의 강사를 역임하고, 사찰의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는 등으로 혁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1948년 제주4․3사건이 일어나자 이세진 스님은 제주사회의 현안에 적극 참여하여 무장대 활동에 나선다. 무장대의 제주도당사령부 소속으로 관음사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1949년 2월 12일 관음사전투의 패배로 귀순하여 3월 경 산에서 내려왔다. 1949년 3월 토벌대의 선무 공작으로 귀순 권고 삐라를 뿌린 후에 내려온 것으로 파악된다. 
이세진 스님은 귀순 후 주정공장에 수용되었다. 주정공장은 군부대의 조병창으로 사용하던 것을 1948년 초토화 작전 이후 수용소 시설로 사용하였다. 제주4‧3사건 시기 가장 규모가 큰 수용소였다. 1948년 겨울부터 고구마를 저장하던 주정공장 언덕 위의 10여 개 창고를 수용소로 쓰기 시작하였다. 

도평리 사라마을에 남아있는 서관음사터.


토벌대가 1949년 3월부터 선무공작을 펼치면서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났다. 1949년 4월 12일 상황 보고에 의하면 포로가 3,600여 명으로 보고된다. 포로라는 이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로 초토화 작전으로 인한 무차별 학살을 피해 산으로 도망갔다가 내려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세진 스님은 귀순하여 하산한 후 토벌대에 포로로 잡혀 주정공장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잠시 풀려나 관음사포교당에서 은신하다 1949년 7월 9일 사복경찰에 잡혀나가 수장되었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서관음사 

제주시 도평리에 있었으나 제주4‧3사건으로 폐사되었다.
서관음사는 1942년에 이세진 스님이 창건했다. 이세진 스님은 1939년 제주불교연맹에서 교육부장으로 활동하였고, 강원도 표훈사 중향강원의 강주, 대각사의 제주강원에서 학인을 배출한 강사 스님이었다. 이세진 스님은 사찰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서관음사에 기와공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제주4‧3사건이 발발하자 이세진 스님은 입산하여 이덕구가 이끄는 무장대의 도당사령부에서 활동했다. 도당사령부는 5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세진 스님은 유격대장 이덕구와 함께 관음사를 근거지로 활동하였으며 권총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1949년 1월 4일 토벌대 대장 함병선은 육해공군 통합작전으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1949년 2월 12일 관음사가 불 질러지고, 무장대가 관음사전투에서 패하면서 이세진 스님은 귀순하였다. 비행기로 귀순 삐라를 뿌렸는데 그 무렵 쯤 귀순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세진 스님은 주정공장에 감금되었다. 당시 관음사 스님과 신도들이 면회하러 다녀오기도 하였다. 면회를 다녀온 광순 스님은 밀밥을 먹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과 취조하는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 죽어나오는 시체 등으로 주정공장 면회를 기억하고 계신다. 이세진 스님은 주정공장에서 풀려나 관음사포교당에 머물고 있던 중 다시 잡혀가 산지 바다에 수장되었다. 1949년 여름 무렵이었다. 이세진 스님에 대한 연구가 있다.(한금실, 「이세진(1910~1949년)의 제주불교혁신운동 연구」(제주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7.)
서관음사가 있던 도평리는 1949년 1월 3일 토벌대의 함정토벌로 도평리 마을주민 70여명이 학살되었다. 외도지서 경찰과 군인이 무장대로 가장하고 주민들에게 무장대에 협조할 것을 종용하면서 무장대 협조 세력을 찾아내기 위한 함정을 꾸몄다. 그러나 이들의 얼굴을 알아본 주민들은 경찰 등이 위장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도평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주민 70여명을 총살하였다. 그리고 도평리 마을을 불 질렀다.
도평리 사라마을에 있던 서관음사도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1980, 90년대 경까지도 서관음사 터에 미륵석불이 남아있었다고 전한다. 서관음사는 이세진 스님의 수장과 토벌대의 방화로 재건되지 못하고 폐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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