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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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넘세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0.1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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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진 에세이 ‘길 위에서’ (4)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 위에서 동네 할망을 만났다. 앞 이를 다 드러내어 활짝 웃는 할망 얼굴은 꽃보다 고왔다.
 “잘도 곱수다,예!”
 “아이고, 팔십이 넘은 할망인디…”
뒤에 말이야 뻔하다. 늙어서 쪼글쪼글한 얼굴이 예쁘다는 게 말이 되느냐. 거짓말도 잘도 하는구나. 뭐 그런 말이 들어있었으리라. 하지만 할망은 거짓말이라도 기분이 좋다는 듯 연신 활짝활짝 웃었다. 할망이 믿든 안 믿든 나는 진심이었다. 온 얼굴에 웃음살을 펼치며 웃는 할망은 정말 예뻤다. 젊은 여자의 매끈한 피부와 분 냄새가 따라잡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할망한테는 있었다.
 “아이고 무슨 팔십이 경 젊수과? 목소리만 들으면 아가씨인 줄 알쿠다.”
내친 김에 카랑카랑 힘이 넘치는 할망의 목소리를( 조금 부풀려서 )칭찬을 해 드렸더니 할망은 더 수줍어하신다. 70년 전 그 소녀는 아직 어디로 아니 가고 부끄럼타며 변명(?)도 한다.
 “아이고게, 여름 전에는 영 안 했는디, 올 여름 너무 더워부난 살도 확 빠져불고 잉…”
 “경해도 곱수다. 평생 걱정거리 없이 살았지예?”
거기서 할망은 바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 자리에 선채로 족히 30분은 되었을 거다.
 젊은 시절 하르방은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그것도 보통 바람이 아니고 첩을 세 번이나 갈아 치웠단다. 남자에게 첩과 돈은 같이 간다. 그 많던 재산은 첩과 딴 살림을 차릴 때마다 뭉텅뭉텅 사라져버리고 할망은 평생 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자기 손으로 아이들을 키웠다고 했다. 그런데도 하르방하고 싸움 한번 안 했다니 믿을 수 있겠는가?
 “어떵 경할 수 이수꽈?”
 “어떵해. 내부렀주.”
무심한 듯 내뱉은 할망의 답이었다.
 “우리 집 하르방이 바람은 피웠어도 술주정을 하거나 때리거나 그러지 않고 점잖았어.”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아이들 다섯을 다 공부시키고 결혼을 시켰는데 모두 자리 잡고 잘 살고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단다. 할망의 얼굴에 햇살보다 곱게 그려진 웃음살 비밀이 밝혀졌다. ‘챙길 것은 챙기고 버릴 것은 버리고!’
  “하르방  밉지도 않우꽈? ”
  “밉기야 밉주마는 어떵해? 경해도 아기들이 다섯이나 있으니 나는 열심히 장사해서 아이들 키웠주.”
 그렇다. 할망은 지혜로웠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랑스런 아내 자리는 얼른 접고,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어머니라는 역할을 멋지게 해낸 것이다. 시대는 변하여 살아가는 모양새는 할망 시대와 많이 달라졌지만 얽히고, 설키고, 아프고, 서럽고, 힘겹기는 마찬가지인 게 우리네 인생살이이다. 오늘 이 길에서 나는 <떠도는 이들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신경림 시인의 <달 넘세>를 읊어본다. 우리도 이와 같이 넘어야 하리.
 
넘어가세 넘어가세 / 논둑밭둑 넘어가세 / 드난살이 모진 설움 / 조롱박에 주워 담고 / 아픔 깊어지거들랑 / 어깨춤 더 흥겹게 / 넘어가세 넘어가세 / 고개 하나 넘어가세 / 얽히고 설킨 인연 / 명주 끊듯 끊어내고 / 새 세월 새 세상엔 / 새 인연이 있으리니 / 넘어가세 넘어가세 / 언덕 다시 넘어가세 / 어르고 으르는 말 / 귓전으로 넘겨 치고 / 으깨지고 깨어진 손/ 서로 끌고 잡고 가세 / 넘어가세 넘어 가세 / 크고 큰 산 넘어 가세 /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고 / 디딜 것은 디디고 / 밟을 것은 밟으면서 / 넘어가세 넘어가세 / 세상 끝까지 넘어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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