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의 양홍기 스님 토벌대에 의해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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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의 양홍기 스님 토벌대에 의해 총살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10.1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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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11> - 원만사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원만사 주지 정법 스님

 

원만사, 1923년 방동화 스님에 의해 창건
양홍기 스님, 냇바위서 죽고 법당은 전소

 

서귀포시 하원동 산 43번지에 자리한 원만사는 법화사의 북쪽 2.5km 지점에 위치한 사찰이다.
원만사 표지석에서 약 1km정도 들어가면 원만사로 가는 옛길을 만날 수 있는데 지금은 이 길 바로 옆으로 시멘트 길이 조성되어 있어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원만사의 옛 모습을 보려면 옛 길을 타고 올라야 원만사가 왜 이곳에 창건됐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숲으로 들어서면 마애불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기암괴석들이 한 없이 작아 보이는 인간을 하심(下心)하라는 듯이 굽어본다. 그 옆으로 원만사로 오르는 108계단이 모든 번뇌를 다 내려놓고 부처님을 참배하라고 한다. 

원만사 전경


원만사는 방동화 스님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방동화 스님은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당시 좌대장으로 참여했다가 6년간 옥고를 치른다. 이 후 1923년 하원동 산자락의 1평 남짓한 자연굴에 의지하며 수행하던 곳에 세운 사찰이 원만사이다. 처음 스님이 숨어 지낼 때 물이 나지 않아 걱정을 했다고 한다. 당시 물은 나지 않고 습기만 남아서 촉촉이 젖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제주불교의 중창주인 안봉려관 스님이 영실에서 물길을 찾았고, 스님이 앞에서 목탁을 ‘톡 톡 톡’ 치면서 걷고, 뒤에서 방동화 스님이 경을 읽으면서 원만사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그 때 목탁소리를 따라 물이 ‘졸 졸 졸’ 따라 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물을 ‘훔쳐온 물’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4.3당시 원만사 소실 후에도 남아 있는 부처님


그러다 스님은 서귀포시 법화사 복원불사에 동참했으나 일제의 감시는 스님을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았다. 이에 1925년에는 범어사로 향해 박만하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곧바로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수행정진하다가 다시 1929년 제주로 돌아온다. 
그러나 1948년 4·3당시 원만사가 해안선 5km이상에 있었기 때문에 토벌대에 의해 사찰이 전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현 원만사 주지 정법 스님의 모친 故 정무생(심연화) 보살의 기억에 따르면 “방동화 스님은 큰 스님이셔서 원만사에 계시기보다 외부 출장이 많다보니 바쁘셨습니다. 그래서 4·3발발이 된 줄 아시고, 작은 부처님만 놓아두시고 법당의 주요 물건 등은 다 갖고 내려갔다”고 증언했다.
이어 정무생 보살은 “당시 방동화 스님의 상좌인 양홍기 스님만이 원만사에서 기도를 하며 계셨어요. 당시 양홍기 스님의 나이는 21살이니 어렸지요. 토벌대들이 원만사에 들이닥치자, 양홍기 스님에게 목장을 지키는 사람에게 안내를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장 사람은 양홍기 스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지요. 속았다고 느낀 토벌대들은 목장 인근 ‘냇바위’에서 스님을 총살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원만사에 주석했던 양홍기 스님도 총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후 원만사는 4·3당시

원만사 샘물

잃어버린 마을처럼 폐허로 남게 된다. 역사의 혼란기가 잠잠해질 무렵 인 1962년 서시용 스님이 방동화 스님에게 원만사를 인수하여 2대 주지에 취임한다. 현 주지 정법스님은 당시 13살에 들어왔다고 한다. 시룡스님이 1972년 입적 후 정법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게 된다. 스님은 1988년 현 진입로를 개설하고 1994년 10월 대웅전, 1995년 강당과 요사를, 1997년 산신각을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원만사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제주교구 소속 사찰이다.
원만사는 법화사보다 더 한라산 속 방향인 광대코지 지경에 위치해 있다. 방동화 스님이 1923년부터 원만사 지경의 굴 속에서 수행하는 등으로 활동하시다가 초가 법당으로 창건하였고, 1938년 십일면관음존상을 봉안하고 활동하였다. 
방동화 스님은 1918년 제주법정사 항일운동에서 지휘부의 좌대장으로 참여한 스님이다. 스님은 제주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았고 옥고를 치르셨다. 제주법정사 항일운동은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며 서귀포시 일대 주민 700여 명이 참여한 제주도내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다. 방동화 스님은 해방으로 조선불교혁신 제주도 승려대회에 참여하여 그간의 제주불교의 친일을 반성하고 전통불교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에 참여한다. 이 대회에서 결성된 제주교구 교무원의 초대 원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원만사는 제주4.3사건으로 1948년 11월 토벌대에 의해 사찰이 전소되었고 경내에 있던 양홍기 스님이 토벌대에 총살당하였다. 원만사는 하원리 4.3성 밖에 위치해 있었고 소개령에 의해 피난하지 않고 하원리 마을 밖 원만사 지경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토벌대의 무차별 공격 대상이 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토벌대는 사람을 보면 이유를 묻지도 않고 보이기만 해도 총을 쏘아대던 초토화 작전을 펼치던 시기였다.
1948년 11월은 소개령의 발령과 초토화 작전의 시기였다. 무장대는 11월 5일 중문지서와 안덕지서를 공격하였고, 토벌대는 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하원 등 서귀포 지역 마을에 대한 학살을 진행한다. 1948년 11월 24일 토벌대는 하원리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킨 후 강득록을 불러내어 총살하고 일부 가옥에 불을 질렀다. 또한 무장대 중 한 명이 마을 청년들의 구타로 죽게 되자 무장대가 하원리를 습격하여 마을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원만사는 1961년 마을 신도들이 움막을 짓고 불상을 다시 모셔오면서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함석 지붕 법당을 거쳐 지금의 대웅전이 1994년에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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