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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목들 엄격하게 지키는 자세 필요”계율의 기초

“재가 불자들이 알아야 할 계율의 기초”는 대만의 대표적인 율학도량인 의덕사에서 유학 중인 스님께서 보낸 원고로 11월4일 연미마을 천진암 신도들이 수계의식을 앞두고 밴드를 통해 함께읽고 공감한 내용입니다. 이번 호 지상법문에 그 내용의 처음 부분을 실었습니다. <편집자주>

 

 

1. 계율에 집착한다는 말에 내포된 오해와 편견 ①
부처님께서는 “계로 인해서 선정이 생기고(인계생정,因戒生定), 선정에서 지혜가 발한다(인정발혜,因定發慧)”라고 능엄경에서 설하셨습니다. 계율을 위한 계율이 아니라 수행을 위한 계율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계율을 위한 계율을 『청정도론』에서는 ‘정체에 빠진 계율’이라고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습니다.
“계를 성취한 것에만 기뻐하여 명상주제를 수행할 마음을 내지 않고, 계를 가진 것으로만 만족하여 향상을 위해 애쓰지 않는 이 비구의 계는 정체에 빠진 것이다. 계를 지니고 삼매를 위해 노력하는 이 비구의 계는 수승함에 동참하는 것이다. 계를 지님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꿰뚫음을 위해 수행하는 이 비구의 계는 꿰뚫음(즉 지혜, 통찰을 의미함)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런데 율장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하신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다면, 계율을 위한 계율에 멈춰질 수가 없고 정체에 빠진 계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방일하게 버려두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몸과 마음을 잘 섭수하고, 나아가 육근(六根)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관찰함으로써 경계에 닥쳐 휩쓸려가지 않는 선정의 힘(定力)이 생깁니다. 이런 상태에서 경전을 보게 되면 이해가 깊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청정계행이 자연스럽게 선정과 지혜로 이어지는 과정이고, 그 결과 우리는 궁극적인 해탈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는 흔히들 계율 이야기만 나오면 계율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계율에 집착하는 그런 폐해가 물론 있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계행에 대한 지나친 중시가 전제 되어야 가능한 일이니, 지금 한국 불교계 상황은 그런 폐해가 있을 정도로 율이 중시되기만 해도 오히려 기쁜 일이라 하겠습니다. 
왜 유독 계율을 수행을 주제로 삼은 이들은 쉬이 비판의 대상이 될까요? 그가 계상(戒相)에 상세히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과연 문제일까요? 염불을 수행으로 삼은 이가 시도 때도 없이 아미타부처님을 염하는 것은 비판하지 않습니다. 참선 수행을 하는 이가 화두를 줄곧 붙들고 있는 것 또한 비판하지 않습니다. 
모든 수행법은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는, 특히 초학자의 경우에는 엄격한 훈련과정이 필요합니다. 화두수행도 초학자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미련함으로 밀어붙여야 하는 시기가 있어야 하는 줄 압니다. 염불수행자도 초학일 때는 억지로 형식적으로라도 입으로 아미타부처님을 찾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계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초학자의 경우는 세세한 계목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자신의 일상에서 이러한 계목들을 집착이라고 보일 정도로 엄격하게 지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오래 오래 단련해야 지범개차(持犯開遮)를 활발하게 적용할 수 있고, 심지계(心地戒)인 보살계의 개차법(開遮法)을 올바르게 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행해지는 개차법은 대부분 자신의 필요에 따른 자기변명의 여지일 가능성이 높거나 잘못된 개차법을 써서 중대한 업을 지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참선을 위한 참선, 염불을 위한 염불, 율을 위한 계율은 모두 동일한 맥락에서 보면 형식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는 누구도 궁극적 해탈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2. 계율에 집착한다는 말에 내포된 오해와 편견 ②
  - 지금은 계율에 집착하는 불자들이 많아져야 하는 시대 
그래서 스님은 희망합니다. 
출가자가 상세한 계목을 연구하고 익히고, 자신의 일상에서 소소한 계율까지 어기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을 곁에서 보면 우리는 수희찬탄기를 희망합니다. “비록 나의 상황과 여건은 그렇지 못하지만 당신의 그러한 모습을 함께 기뻐합니다” 는 수희(隨喜)의 마음을 내야 나에게도 공덕이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계행을 깨뜨리지 않고 지킬 수 있도록 보호해줘야 합니다.
재가불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님을 향해 술이나 고기를 건네면서 ‘몸도 있어야 수행을 합니다’ 혹은 ‘대중을 위해서 드세요’라는 등의 말씀을 함부로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자칫 이 한 마디의 말은 공덕이 아닌 업을 짓기 때문입니다.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나 동료가 오계를 받아서 회식자리에서 술이나 육식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행을 수희찬탄하고 보호해줘야 합니다. 불자가 아닌 분들이 그에게 술을 강권하면 옆자리에서 대신 받아 마셔주시기 바랍니다. 불자로서 채식을 하는 이를 만나면 그를 위해서 특별히 야채 위주의 음식을 하나 더 주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의치 않으면 내 앞에 놓은 야채 한 접시 은근슬쩍 밀어서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 문화는 그런 이를 보면‘유별나게 군다. 집착하지 말라. 너만 청정하냐’등의 반응을 하고 계행을 깨뜨리도록 강권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불자로써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쁜 구업을 짓는 것이며, 상대방의 청정 계행을 무너뜨리는 것은 중죄의 과보를 받게 됩니다. 
오계를 받은 신 불자들은 당당하게 나는 오계를 지키기 때문에 술은 안마신다고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계율을 너무 강조하면 깨달음을 얻는 대자유인이 나오기 어렵다는 말씀에 반대합니다. 
불법이 성하는 것은 율종의 대스승이 출현해서가 아니고 진정 깨달음을 이룬 스승이 출현해서 창대해진 것이다는 말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역사에 출현했던 대스승들 가운데 특정 종파나 수행법을 집착하고 그것에만 매몰된 분들은 없습니다. 그 분들이 집착이나 특정 수행에 고정되었다면 큰 깨달음을 결단코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의 공통적 특성은 하나같이 청정한 계행을 기본 바탕으로 선정과 지혜를 모두 구족하셨다는 점입니다. 위대한 스승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지 어느 종파에 소속되어 있어서 탄생하거나 탄생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의 근기가 쳐지다 보니 한 분야만 깊이 파기에도 한 생이 부족해서 율사, 선사, 강사라는 구분이 생겼지만 실상 큰 성과를 이룬 대스승들은 선사이면서 동시에 강사이면서 동시에 율사였습니다. 
당나라 도선율사께서 비록 율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는 하나, 삼장(三藏)에 통달하신 분이며 천인(天人)의 공양을 받으셨다고 기록될 정도로 삼매력이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동진시대 백련결사의 혜원스님 또한 오후에 미음죽을 드시도록 권하는 제자들에게 비시식(非時食: 적당하지 못한 때, 즉 오후에 공양함)을 허락하는 근거 조항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 후 제자가 율사에게 청하러 간 사이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명나라 영봉우익대사는 선종과 천태종 및 정토종의 교주로 자리매김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 또한 지계청정을 강조하시고 엄정하게 실천하시면서 계율 관련하여 많은 주석서를 쓰신 율사이기도 합니다. 
선종의 많은 대스승들께서도 지계를 소홀히 한 분이 없는 줄 압니다. 다만 후학을 제접하기 위한 방편,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 방편법을 시설하신 경우는 있겠지요. 현대 중국 선종의 맥을 살려내신 허운화상 역시 임종시 수행의 요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戒”라는 한마디였습니다. 이분들의 엄정한 계행을 어찌 계율에 집착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만나본 계행청정한 분들은 그분들의 계향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금새 눈에 띄었습니다. 가깝게는 은사스님이 그러하셨고, 지금 유학중인 대만에서 뵈온 과청율사스님, 천인율사스님, 본인율사스님, 베트남의 명통화상 등이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과청율사 스님과 관련한 일화와 어른 스님들 말씀을 적으면서 글을 마칩니다. 
스님께서 다른 지역에 법문을 하러 가시는데 한 거사가 스님을 모시고 갔다가 절에 다시 모시고 왔다고 합니다. 화상께서는 혼자 있으시면 거의 말씀을 하지 않고 염불을 하십니다. 그날도 화상은 차에 앉아서 당신 수행을 하셨을 뿐입니니다. 그 거사는 담배를 아주 심하게 피우는 분이셨는데 화상을 모시고 운전하면서 오가는 도중에 화상의 청정하고 자비로운 위의에 감복되어 그날로 즉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정계법사(淨界法師) : 
“초학자는 본래 보수적이어야 한다. 과실을 멀리해야 한다.
컵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컵이 새지 않도록 잘 살피는 것이 먼저다.”
혜율법사(慧律法師) : 
“지계(持戒)는 자기를 지키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못봐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점검하는데 사용하고 다른 이들을 달아보는 잣대로 삼지 않아야 해탈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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