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사는 전략적 요충지, 토벌대와 무장대 간‘대치’
상태바
관음사는 전략적 요충지, 토벌대와 무장대 간‘대치’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10.17 15: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12> 아라동 관음사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편집자주>

 

 

관음사에 남아있는 유적

 

열세 살 광순 스님, “이덕구, 얼굴엔 곰보자국”
주정공장에 끌려간 이세진스님 면회 가기도
 

한라산 650m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는 제주불교의 중심이다.
구전에 따르면 고려 문종 때 창건됐다는 설이 있고,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사찰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다 조선 1702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제주지역 사찰 전부가 훼철되면서 관음사도 사라지게 된다.
200여 년의 명맥불교를 유지하다 지난 1908년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중창됐다. 스님은 해월굴에서 3년동안 관음기도를 드리며 법당과 요사를 완공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통영 용화사 등에서 불상과 탱화 등을 모셔와 여법한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절의 외형을 갖추는 불사가 일단락되자 제주 중심지인 중앙로에 시내 포교당인 대각사를 세워 제주도민과 함께 호흡하는 적극적인 포교활동에 나선다. 오랜 시간 맥이 끊겼던 제주의 불교가 관음사를 중심으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관음사에도 4.3광풍이 불어 닥친다. 당시 관음사의 위치가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토벌대와 입산 무장대가 관음사 지역을 중심으로 상호 간 첨예하게 대치했다.

관음사에 남아있는 유적


이러한 과정에서 관음사는 모든 전각이 전소된다. 
이 같은 참혹한 기억을 아직도 뇌리 속에 지워지지 않는 분이 계시다. 바로 4.3당시 열세 살 나이에 관음사에 기거했던 광순 스님(명법사 주지)이다. 
“제가 구좌읍 김녕리 출신이에요. 제가 독자였는데 1945년 해방되면서 마을에 콜레라가 돌면서 이를 피해 아버지를 따라 관음사로 올라갔던 겁니다. 당시 오이화 스님이 관음사 주지 스님이었어요. 그리고 종선 스님의 할머니인 대지월 보살님, 김석윤 스님의 아들이었던 김성수 스님이 총무였고, 그 밑에 동생이었던 덕수 스님도 저랑 같이 교육도 받았어요.”
그러나 4.3이 발발하면서 경찰과 군인들이 20여 명이 올라와 관음사에 불을 지른다. 양력으로 2월 경인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천둥치고 벼락이 쳤다고 기억했다. 스님은 아버지와 함께 중앙로의 관음사 포교당으로 내려오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 기억은 생생했다.
“이세진 스님은 무장대의 간부였어요. 권총을 무장했을 정도니까요. 무장대 간부급도 관음사에 거주했는데 군복을 입은 군인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덕구의 얼굴도 직접 봤는데 얼굴엔 곰보자국이 있었죠. 무장대 10여 명이 관음사에서 밥도 해먹었지만 우리에게는 피해를 주지는 않았어요.” 
당시 학승으로 널리 알려졌던 이세진 스님에 대한 기억은 더욱 또렷했다. 당시 토벌대가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를 비행기에서 뿌렸는데 그리고 나서 이세진 스님이 귀순했을 거라 기억했다. 스님은 하산한 후 토벌대에 포로로 잡혀 주정공장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포교당에 있으면서 주정공장에 이세진 스님이 잡혀 있다하여 관음사 신도들과 함께 스님을 면회하러 갔었어요. 취조하는 소리, 비명 지르는 소리 등 지옥 같았어요. 가마니로 둘둘 말아 시체가 내쳐지는 모습도 봤어요. 여름이었는데 시체 썩는 냄새까지 그런 지옥이 없었지요.”
스님은 주정공장에서 고문을 받다가 풀려난다. 당시는 양민증이 있어야 타 지방으로 갈 수 있었지만 스님은 제주시 외도 수정사지에 기거하다가 1949년 7월 9일 사복경찰에 잡혀나가 수장되었다.

4.3당시 난 총탄 구멍


관음사가 전소되자 군인들은 병력과 민간인들을 동원하여 폐허가 된 관음사 경내에 주둔지를 구축했다. 숙영지와 초소 등 27곳의 방어유적과 돌담으로 제1, 제2 방어선을 겹겹이 구축했다. 1955년까지도 관음사 터는 경찰유격대의 전초선 신선대 사령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관음사

관음사는 제주시 아라 1동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사찰이다.
제주4.3시기 관음사는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관음사전투 격전지였다. 당시 관음사는 대웅전, 선방, 향적실, 해월각, 노전, 종각, 일주문 등을 구비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제주4.3사건으로 이 모든 건물이 토벌대에 의해 소각되었고 주지 오이화 스님은 토벌대의 고문 후유증으로 입적에 이르기도 하였다. 
관음사는 무장대 도당 사령부의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덕구의 무장대 도당 사령부는 삼의양악 인근에 위치하여 활동하였다. 바로 관음사 초입이며 소림사가 있던 일대이다. 관음사의 이세진 스님이 무장대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하는 등의 인연으로 관음사는 무장대의 주둔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세진 스님은 제주 사회의 격변기 제주인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한 행동으로 제주4.3사건에 무장대로 적극 참여 하였다. 권총을 차고 다니던 무장대 간부급이기도 하였다.
1949년 1월 4일 토벌대는 한라산 공습을 실시하였고 이때부터 관음사 일대는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격전지가 된다. 일명 관음사전투로 명명된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전투가 관음사 일대에서 일어났다. 미군이 비행기로 집중 포격을 가하는 등의 총공격이 있었다. 무장대는 관음사 전투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고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관음사전투 중 관음사를 접수한 토벌대는 1949년 2월 12일 관음사 전각에 불을 질렀다. 대웅전을 비롯한 7채의 모든 전각에 불을 질러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목불상에 불을 놓자 맑은 대낮에 갑자기 천둥벼락과 비바람이 쳐 일대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토벌대 제2연대 제2대대가 관음사에 주둔하기도 하였고 관음사 뒷산 아미봉을 평화고지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관음사는 더 이상 사찰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었고 관음사의 소속 사찰인 소림사도 일대 마을과 함께 불 질러져 한라산 내에서의 불교활동이 모두 중단된 지경이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되고 나서도 관음사는 경찰유격대의 전초선 신선대 사령부로 사용되며 경찰의 소총 사격경기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관음사는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중창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관음사 아미봉 곳곳에 초소를 비롯한 주둔지의 흔적이 숲속에 남아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