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당시 대웅전, 강제 매입으로 면사무소로 사용
상태바
4.3당시 대웅전, 강제 매입으로 면사무소로 사용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10.24 15: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13> - 조천읍 조천리‘고관사’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1960년 중반을 넘어 석조건물로 지어진 고관사 지장전

 

조천초 인근에 아미타부처님 봉안하고 사찰 명맥
고통받는 주민들 의지처, 담당하며 수행했던 사찰
 

조천포구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관문이었다. 육지와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문이었기에 조천은 과거 연육의 교통 요충지였다. 그만큼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조천리,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지켜보며 속수무책으로 감내해야 했던 일제하의 참담한 과거로 안겨준 아픈 상처들. 역사의 피해자이면서도 고통받는 주민들의 의지처로서 역할을 담당하며 수행해왔던 사찰이 바로 고관사다.
옛 관음사라는 뜻이 사명이 보여주듯이 고관사(故觀寺)는 고려 전기에 창건되어 19세기 중엽까지 존속했던 옛 관음사의 명맥을 이은 사찰로 1927년 화주 고계부와 강정완 보살이 기와로 된 개인 주택을 매입해 선암사 제주포교사로 창건하게 된다.

4.3이전에 고관사에 모셨던 아미타부처님.


1930년 고자선 보살이 전라남도 선암사에서 목조 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봉안하면서 사찰의 기반을 닦게 된다. 고관사는 신도가 증가함에 따라 1938년 마을 재가불자들과 함께 지장계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불교 활동을 펼쳤지만, 1948년 4.3이 발발하면서 그 여파로 조천면 사무소가 불에 타면서 고관사 대웅전이 강제로 매각된다. 고관사 대웅전이 조천면 면사무소로 이용되자 강정완 보살 등은 조천초등학교 인근 사가에 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명맥을 잇게 된다.
고관사 창건주인 강정완 보살의 외동딸 김영환(만 97세) 보살의 남편도 4.3 당시 ‘폭도’로 몰려, 제주시 박성내에서 총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남편을 잃은 슬픔도 잠시, 김영환 보살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무신 장사를 하며 자신이 뱃속으로 나은 자식들과 더불어 절과 인연이 된 어린 자녀 3명을 키우는 등 관세음보살의 화신처럼 삶을 살아온다.
김영환 보살의 딸 이명자 씨는 “석유 등잔불에서 어머니가 반야심경을 외우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면서 “사찰의 재일이나 안택기도가 있으면 어머니가 떡이나 묵을 쑤시는 등 정말 사찰일을 자신의 일처럼 정성을 다하셨던 분”이라고 회상했다.

1970년대 부처님오신날을 맞은 고관사 신도들의 모습.


4.3이 안정을 찾으면서 강정완 창건주와 신도들은 강제로 매입당했던 옛 법당을 찾아 나선다. 
당시 1958년 주지로 부임했다가 지금은 환속한 향촌 거사에 따르면 “고관사는 내가 1958년 5월경에 한심스러웠다. 건물이라고는 전통식 기와집으로 면적은 알 수 없었지만 창고 한 채와 화장실 곁에 작은 초가집 한 채가 전부였다. 법당 건물 한켠에 적은 방 하나가 붙여 있었다”고 증언했다.
스님은 새롭게 법당을 짓고자 1963년 모연을 했으나 고관사 신도들의 주머니 사정으로 자신이 구상하는 법당을 세우기가 어려울 것 같아, 고심 끝에 손수 법당을 짓는데 온 몸을 바치게 된다.
스님은 “직접 인력거와 망치, 골채를 사고 자갈과 모래 등을 사다가 직접 집을 짓는데 공을 들이다보니 불사를 잘 마칠 수 있었다”면서 “불사를 내 손으로 마칠 수가 있어서 혼자 방에서 불보살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석조 건물로 다시 지어진 건물이 바로 지금의 지장전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가 넘쳐난다. 
그리고 고관사의 도량 가운데는 부처님의 ‘불족’이 하얀 대리석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 사리 2과를 모신 3층 석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고관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 말사로 조천읍 조천리 마을 안에 있다. 고관사는 1927년경 화주 고계부와 강정완이 기와로 된 사가를 매입하여 선암사 제주포교소로 창건하였다. 1930년에는 고자선이 선암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와 봉안하였다. 
1948년 제주4․3사건 시기에 조천면사무소가 무장대의 공격에 의해 불타버렸다. 이에 면장이 고관사를 매각할 것을 총을 들이대며 협박하였다. 기와 법당과 초가 한 채를 40만원에 매각하고 불상과 탱화를 사가에 옮겨 모시었다. 돌아온 이후 1968년경에 재매입하였다. 당시 함께 했던 기와 법당과 초가는 헐리었고 탱화 일부는 훼손되어 없앴다. 당시의 아미타불상과 독성탱화가 지금 고관사에 남아있다.
고관사가 위치한 마을 조천은 제주4.3사건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한 마을이다. 조천리는 해방 이후 제주사회 흐름에 적극 동참한 마을이다. 1948년 1월에는 남로당 조천지부 회의장을 제주경찰이 급습하여 220여 명을 검거하기도 하는 등에서 조천 마을 사람들의 동향을 알 수 있기도 하다. 3월에는 조천중학원의 김용철 학생이 조천지서에서 취조를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학생과 주민들이 지서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하기도 하는 등으로 적극적이었다. 
1948년 5.10선거 준비 기간에는 투표소가 방화되기도 하였다. 10월 23일 무장대가 조천지서를 공격하였고 11월 4일에는 조천면사무소를 다시 11월 11일에 조천지서를 공격하였다. 조천면사무소는 불에 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무장대의 활동으로 토벌대는 마을주민들을 대상으로 보복학살을 벌였다. 이를 피해 주민들이 대규모 입산하기도 하였다. 입산자가 있는 집안은 입산이 죄가 되었고, 도로 내려와 귀순한 사람들은 또 입산 경력을 죄로 하여 학살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12월 21일에는 조천리가 무장대의 공격을 받자 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을 총살하였다. 토벌대는 자수해서 내려온 조천면 주민 150명을 제주시 박성내로 데려가 집단 총살을 하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