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은 신업과 구업에 브레이크를 거는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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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은 신업과 구업에 브레이크를 거는 장치”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0.3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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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 불자들이 알아야 할 계율의 기초”는 대만의 대표적인 율학도량인 의덕사에서 유학 중인 스님께서 보낸 원고로 11월4일 연미마을 천진암 신도들이 수계의식을 앞두고 밴드를 통해 함께 읽고 공감한 내용을 실었다. /편집자주


오로지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계율의 속박은 우리들을 
진정한 자유와 해탈로 
안내합니다

 

2. 불교를 배우는데 왜 반드시 계를 배워야 하는가?
   (法鼓文化編輯部 受戒50問 중)

불교에 있는 모든 법문은 어느 것도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계정혜 삼학입니다.  이 「3무루학(無漏學)」 가운데 선정을 닦고 지혜를 발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 지계입니다. 
계율에 의지하여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는 공능에서 심신의 안온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면 곧 선정 수행을 하는데 이득이 됩니다. 마음이 진일보하여 청정하고 맑음 가운데 머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점차로 마음이 밝아지고 성품을 보게 되어 지혜가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삼무루학(三無漏學)을 삼증상학(三增上學)이라고도 합니다. 이 셋은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으며 층층의 차례로 증상하게 됩니다. 이 가운데 계가 바로 근본이 됩니다.  
부처님의 계를 받지 않은 채 자칭 불교를 믿고 불법을 배운다 해도 사실은 불교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교인으로서 일단 불문에 들어서는 첫 관건이 계를 받는 것입니다. 
만일 계를 받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으면 불교를 올바로 믿고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불도에서 벗어나도 자기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계를 통해서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불교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결코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계율입니다. 계법을 회피하고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계정혜 3무루학 이외에 또 아래와 같은 것들이 중요합니다. 
수계는 부처님을 믿고, 법을 배우고, 승단을 존중하는 첫 걸음입니다. 북전불교를 배우든, 티베트불교를 배우든, 남전불교를 배우든, 혹은 선종, 정토종, 밀종 등 어떤 수행을 하든지 간에 불법을 수학하고 발현하는데 있어 계학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학은 생명 있는 것들이 불법에서 얻을 수 있는 효용 가운데 가장 기본인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몸을 안정시킬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지혜를 개발하고 생사해탈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지계(持戒)를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3. 계율 지키기는 정말 어렵고, 의무감으로 생각되어 부담스럽다는 불자님들에게
스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도 계율을 다 잘 지키기는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계율이라는 단어는 일단 듣기만 하면 왠지 모를 속박 혹은 구속의 기분이 먼저 다가와서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고, 잘 못 지키면 어쩌나 하는 부담을 주기도 하지요. 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게 되는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여러 불자님들은 불교를 만나고 좋은 스님들을 만나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분명 어떤 변화가 있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삼보에 귀의하고, 각종 법회와 기도 혹은 수행을 통해 공덕과 지혜를 쌓아가고, 좋은 도반들과 법담을 하면서 서로 격려하며 함께 성장하고, 이웃과 타인을 배려하는 그런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계시잖아요. 
이것은 여러분들께서 이미 보통 범부의 삶을 벗어나 성인으로 가는 새 길을 걷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죠.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 나가면서,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이 최선이었던 삶에서 나와 타인이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으셨나요? 
이미 불자(佛子)라 불리우는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자녀로서 그 분의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서게 되었으니 안타깝게도 이젠 다시 탐진치에 얽매인 범부의 삶, 질긴 무명번뇌와 업과 고통으로 악순환 하는 생로병사의 길로 되돌아갈 수 없답니다.
이제 다시 계율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요?
세상의 모든 속박은 자유를 구속합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지나치면 속박이 되지요.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속박들 가운데 오로지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계율의 속박’은 우리들을 ‘진정한 자유와 해탈’로 안내합니다. 참 신기하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했던 모든 것들은 탐진치 삼독에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는 말과 행동과 마음이었답니다. 늘 듣는 게송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嗔痴) 종신구의지소생(從身語意之所生)”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렇게 오염된 채 휩쓸려 다니던 신구의 삼업 때문에 우리는 삼계를 돌면서 육도 윤회를 하다가 이번에도 또 생을 받았지요. 그런데 천만다행 만만다행으로 인간 몸 받았고 게다가 불법을 만났으니 얼마나 귀한 시간들인지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우리들로 하여금 궁극적으로는 열반과 해탈에 이르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계율은 오염된 신구의 삼업, 그 가운데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신업과 구업에 브레이크를 거는 장치입니다. 지금까지의 오염된 방식으로는 육도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그 열반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신업과 구업을 우선 청정하게 맑혀야 한다고, 그래서 사실상 여러분들이 계율을 통해 속박의 느낌을 받는다면 제대로 된 출발을 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깨진 독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물이 고이지 않듯이, 불자로서 수행의 길에 들어선 이들은 우선 자신의 독에 금이 간 부분은 없는지, 깨진 부분은 없는지 세밀히 살펴봐야 하는데 그렇게 세밀히 살피는 작업이 바로 계율을 통해 신구의 삼업을 맑히는 과정인 것 같아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스님도 사실은 계율을 잘 지키지는 못하고 있어요. 매일 예불 끝자락에 스님 한 분에게 오늘 하루 자신이 범한 계목을 발로하고, 매달 보름 보름마다 포살을 할 때 범한 항목을 스님에게 정식으로 참회하는데 늘 범하는 항목을 자주 범하게 되어요. 
늘 범하는 그 항목이 사실 제 번뇌의 원인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표시거든요. 그래서 범하면서도 매번 참회의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어요. 참회를 통해 다시 살피고,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행위들이 뒤따르게 되니까요. 
이렇게 자신의 신업과 구업 나아가서 의업을 세밀히 살피고 관찰하면서  조심하는 행위들이 미세해지면 자연스럽게 악업을 짓는 일과는 멀어지고 선업을 행하는 삶이 펼쳐지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는 경전을 보거나 수행을 하면 진전이 무척 빠르겠지요.
그것이 바로 과거 현재의 모든 고승대덕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모든 불교공부는 계정혜 삼학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 아닐까 생각합니다. 

4. 삶의 변화를 원하지만 계를 잘 못 지킬까 걱정하는 불자들에게
어느 불자님이 스님에게 물어왔습니다. 
“저는 계는 잘 못 지키면서 좀 크게 변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이는 약간 뒤바뀐 생각이 아닐까요? 계를 잘 지키면서 공부하다보면 저절로 때가 오련만 결과에 대한 욕심이 앞서는 중생심이라니요~~~”.
질문 속에 이미 답까지 다 들어 있지만 스님이 조금만 더 보태겠습니다. 

● 부처님께서 계를 제정하신 이유
앞 선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불문에 입문한 불자로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삼귀의 오계를 받는 것입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분들은 불학(佛學), 즉 불교를 학문으로 공부하는 분들이지 학불(學佛), 즉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불자(佛子)는 아닙니다. 
여래께서 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탐진치 등의 번뇌로 여러 악업을 짓고, 그 악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육도윤회하면서 삼악도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시고, 중생이 고통을 벗어나 생사를 요달하고, 필경에는 불도를 성취하게 할 목적으로 계를 제정하셨습니다.
범부에서 성불로 가는 단계를 계율적 측면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혹업고(惑業苦: 미혹함으로 업을 짓고 고통받음)의 생사윤회 중인 중생을 보시고 →부처님께서 계율 제정 →경계(敬戒: 계율을 공경함) →수계(受戒: 계를 받음) →학계(學戒: 계를 학습함) →지계(持戒: 계를 지킴) →홍계(弘戒: 계를 넗혀감) →원계(圓戒: 계를 완성함) →성불(成佛: 부처가 됨) 

● 계를 받을 때의 마음자세
원력을 가지고 스스로를 정화하는 힘을 기르고 선량한 습성을 익혀 십법계의 유정무정 및 모든 중생과 사물을 대상으로 자비심을 실천하는 것이 계를 받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수계식 때는, “시방법계 일체 유정 무정에 대해 일체 악을 끊고, 일체 선을 행하겠습니다. 일체 중생이 불도를 이루도록 제도하겠습니다.”라는 대승보살의 보리심을 발해야 합니다. 
악업을 끊고(斷惡),선업을 닦아(修善),중생을 제도(廣度眾生)하겠다는 서원력을 가지고 계를 받으면, 방비지악(防非止惡)의 공능을 가지는 계체(戒體)를 얻게 됩니다. 이 계체는 십계법(十法界)의 모든 선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수계 이후 행하는 모든 행위는 일체중생을 대상으로 평등하게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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